1차 세계대전 캐나다 군단 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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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은 anyan님. 1차 세계대전 캐나다 군단 장교 복색>
캐나다 군단은 1차 세계대전 당시 캐나다인 지원병으로 구성된 군단이었습니다. 1차 세계대전은 많은 분들이 아시듯, 참호와 철조망, 기관총, 독가스, 대규모 포격 등으로 대량 학살이 벌어지고 전선 변동은 거의 없는 끔찍한 전쟁이었습니다. 이걸 극복하기 위해 탱크 같은 게 개발이 되었습니다만, 탱크가 투입되어도 한 동안은 전선은 그대로였죠.
이런 끔찍한 전장에서도, 캐나다 군단의 용맹과 전과는 대단한 것이었습니다. 그 한 예가 비미 능선 전투였습니다. 이 전투는 영국군의 아라스 전투의 한 부분이었는데, 캐나다군은 당시 난공불락으로 독일군에게 평가되던 비미 능선을 점령하는데 성공합니다. 수많은 피를 흘리고도, 1km 진격도 할 수 없던 그 끔찍한 1차 세계대전 전장에서도, 캐나다 군단의 돌파력은 대단한 것이었죠.
이런 류의 부대를 군사 용어로 충격군이라 부르곤 합니다. 충격군으로 당시 독일군에는 스톰 트루퍼(스타워즈의 스톰 트루퍼가 여기서 나온 것이고, 스타워즈와는 달리 뛰어난 전선 돌파 선봉대로서 악명이 높았습니다)가 있었다면, 협상국 측에서는 캐나다 군단이 유명했었습니다.
이 캐나다 군단의 돌파력은 1차 세계대전의 종식을 알리는 백일전투에서도 여실히 드러났습니다. 캐나다 군단을 선봉으로 한 협상국 병력들은 독일군 전선을 돌파하여 그동안 빼앗겼던 프랑스 영토를 대부분 되찾고 벨기에 지역도 탈환해가며 독일 국경 근처까지 진격을 하게 됩니다. 그리고 전쟁은 끝나게 되구요.
이런 캐나다 군의 전투력은 2차 세계대전 때에도 잘 드러났습니다. 캐나다군은 노르망디 상륙 작전에서 주노 해변에 상륙해 독일군 방어선을 신속히 뚫어버렸으며, 노르망디 전역에서 큰 피해를 입긴 했지만, 티거 탱크를 몰고 연합군 탱크 수십대를 터뜨리던 미하일 비트만을 폭사시키는 등 혁혁한 공을 세우기도 하였습니다. 그 후에도 영국군 최선봉에 서서 많은 전공을 쌓은 게 캐나다군이었습니다.
또한 한국전쟁에서도 캐나다 군은 그 이름을 널리 알렸는데, 중공군의 춘계 공세를 가평에서 저지한 가평 지구 전투가 유명합니다. 가평 전투에서 캐나다 군이 중공군을 저지함으로서 유엔군이 섬멸되지 않아 서울도 점령되지 않았고, 공산 측은 최종적으로 적화통일을 포기했으니, 한국전쟁사 측면에서 매우 중요한 전투였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 외에도 캐나다 군은 여러 전공을 세웠으나 피해도 적지 않아서 516명 사망, 1,212명 부상이라는 큰 피해를 봤다고 하네요.
하지만, 이런 전과 이상으로 캐나다 군단의 가장 큰 기여는 캐나다라는 국가/국민 정체성을 가져왔다는 것입니다. 이런 전쟁 경험은 캐나다로 캐나다인을 결속시켰으며, 결국 캐나다가 영국 식민지나 자치령이 아닌 독립국이 되는데 큰 기여를 하게 되죠.
FV4030님의 댓글의 댓글
감정노동자님의 댓글의 댓글
문산포종님의 댓글

요즘 유투브 역전다방이라는 프로그램에서 1차대전 다뤄주고 있는데 재밌게 잘 보고 있습니다.
FV4030님의 댓글의 댓글
문산포종님의 댓글의 댓글
blowtorch님의 댓글

실패로 끝난 1942년 디에프 강습도 캐나다군이 주축이었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사상자가 절반 이상이었다고 하더군요.
그러고 보니 캐나다는 비극적인 무대의 첨병 역할을 자주 맡네요.
FV4030님의 댓글의 댓글
PearlCadillac님의 댓글

미군에 묻혀서 잘 모르는 캐나다군인데
잘 싸우는 군대였군요 ㄷㄷㄷ
FV4030님의 댓글의 댓글
1. 자율성과 창의적인 전술
캐나다 군은 영국군의 지휘를 받았지만, 전장에서 비교적 자율성을 보장받아 창의적인 전술을 사용할 수 있었습니다.
특히 **비미 능선 전투(Vimy Ridge, 1917)**에서 캐나다 군은 철저한 사전 준비와 혁신적인 돌격 전술로 독일군의 방어선을 돌파하는 데 성공했습니다.
2. 철저한 훈련과 준비
캐나다 군은 프랑스 전선에 배치되기 전, 영국에서 철저한 훈련을 받았습니다.
특히 참호전에서 효과적인 전술을 연구하고 신기술(철조망 절단, 진격 루트 사전 확보 등)을 적용했습니다.
3. 통합적인 작전 수행
보병, 포병, 공병, 그리고 기관총 부대 간의 협력 작전이 뛰어났습니다.
비미 능선 전투에서는 사전 포격 작전과 보병 진격을 정밀하게 조율하여 전례 없는 승리를 거뒀습니다.
4. 사기와 국가 정체성의 성장
캐나다 군은 영국군의 일부였지만, 독립적인 군대로 인식되면서 자긍심이 높았습니다.
특히 비미 능선 전투 승리 이후, 캐나다는 전 세계적으로 군사력을 인정받으며 국가적 정체성이 강화되었습니다.
5. 전장의 경험과 전투력 강화
캐나다 군은 1915년 이프르 전투에서 독일군의 최초 독가스 공격을 견뎌내며 혹독한 실전 경험을 쌓았습니다.
이후 여러 전투에서 경험이 풍부한 군대로 성장하여 **1918년 "100일 공세"**에서 결정적인 역할을 했습니다.
결론
캐나다 군은 철저한 훈련과 혁신적인 전술, 뛰어난 협력 작전, 강한 전투 의지로 제1차 세계대전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습니다. 이로 인해 캐나다는 단순한 영국의 식민지가 아닌, 독립적인 국가로서의 위상을 확립하는 계기를 마련했습니다.
챗지피티는 이렇게 말해주는데, 일단 자원병이었다는 점과 훈련, 자체 전술 개발 등 노력의 결과물, 그리고 추운 지역에서 사냥을 많이 하다 보니 뛰어난 사격 실력 등을 들 수 있겠네요.
kjpooh님의 댓글의 댓글
LV426님의 댓글

트럼프가 자꾸 건드리면 역사를 재현할 지도?
FV4030님의 댓글의 댓글
니파님의 댓글

감정노동자님의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