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기고양이 (223.♡.90.186)
2026년 5월 4일 PM 08:45
6.10만세운동 사적지 답사 후기 1 : https://damoang.net/free/6220907
6.10만세운동 사적지 답사 후기 2 : https://damoang.net/free/6224297
에 이어 3편 들어갑니다.
5. 단성사 : 6.10만세운동의 시작을 알리다
주소 : 서울 종로구 돈화문로 26
다음 답사 장소로 으르신들은 많이들 아실, 영화관 단성사 앞으로 이동했는데요.
서편제가 단성사에서 개봉됐을 당시 동묘앞까지 줄을 섰을 정도라고 하던데 그때 줄 서 계셨던 으르신들이 다모앙에도 계실런지요.^^
저는 친구 따라 피카디리 극장에 가서 8월의 크리스마스를 본 게 기억납니다. 그때는 어려서 왜 그 영화가 좋다는 건지 이해를 못 하고 왔었는데, 답사지가 딱 그 앞이었습니다.

네이버지도를 캡쳐해서 위치를 표시했는데요.
1926년 6월 10일 오전 8시 순종의 시신을 실은 대여가 창덕궁을 출발해서 종로 3가 단성사와 위 지도의 '카페 피디' 앞을 막 지나간 직후, 동양루(명월관의 별관이었고 오랫동안 음식점이었던 것으로 전해짐) 앞에 도열하고 있던 중앙고 학생들이 이선호의 선창으로 '대한독립만세!'를 외치며 격문 약 1천장을 살포한 것이 6.10만세운동의 시작이었습니다.

동양루에 하늘색 표시를 했고, 사진은 권오설권오상기념사업회 홈페이지에서 가져왔습니다.
이선호가 만세를 선창했던 곳에 표지석이 있었는데요. 바로 옆에 무슨 노점이 있어서 간이 식탁과 의자도 있고 해서 일부러 찾아보지 않는 한 보기가 어려웠습니다. ㅠㅠ

이때 뿌렸던 격문은 두 가지가 있었는데요.
<조선학생과학연구회 격문>
2천만 동포야!
원수를 몰아내자!
피의 값은 자유이다!
대한독립만세!
<통동계 격문>
조선 민족아
우리의 철천지 원수는 자본제국주의 일본이다.
2천만 동포야
죽엄을 결단코 싸우자.
만세! 만세!
조선독립만세!
단기 4269년 6월 10일
조선민족대표 김성수 최남선 최린
이 민족대표는 동의한 적이 없는데 권위를 부여하기 위해 학생들이 이름을 썼다고 하네요.
이 장소가 좁고 복잡해서, 학생들의 격문이 어떻게 만들어졌는지 등에 대해서는 다음 답사지인 권오설의 아지트에서 설명을 들었습니다.
6. 권오설 아지트 터 : 6.10만세운동 추진 거점
주소 : 서울 종로구 종로22길 14 (장사동 52번지)
앞편 후기에서 언급했던 인쇄 책임자 박래원이 6월 6일 저녁 7시쯤 붙잡힌 후 격문 원고는 누가 썼고, 돈은 어디에서 났는지 등에 대해 추궁을 당한 끝에 6월 7일 아침 10시에 권오설이 시킨 것이고, 권오설의 아지트가 장사동 52번지라는 것을 실토를 했습니다.

권오설이 살 때는 ㄱ자 건물이었는데 현재는 3층 건물이 들어서있습니다.
1925년 12월부터 그렇게 잡고 싶어했던 권오설의 위치를 파악한 경찰이 아지트터에 습격했을 당시 권오설은 집에서 나오고 있던 참이었습니다.
상해에서 김단야가 보낸 삐라가 서울역에 도착해서 찾으러 가던 시각이 오전 11시였는데 30분만 일찍 나갔어도 붙잡히지 않았을 것이라 너무 안타까운 장면이었습니다.
권오설의 심문기록을 읽으면 눈물이 날 정도라고 하는데요.
권오설을 만난 강달영(2차공산당 책임비서)가 김단야에게 편지가 왔는데 네가 이런 것을 계획하고 있다던데 맞냐고 묻고는 네가 책임지고 하라(공산당 재건을 위해 어쩔 수 없었음)는 답변을 듣고 권오설이 갖고 있던 돈을 다 써서 박래원 등과 삐라를 찍었고, 김단야로부터 돈을 기다리고 있었는데 도착하지 않은채 날짜가 임박해서 안정식에게 하소연을 하며 증거로 보여준 삐라 때문에 박래원과 권오설이 차례로 잡힌 것이었고, 어떻게 할 계획이었는지에 대한 질문에 '지방으로 삐라 보낼 돈이 없어서 서울에서 다 뿌리기로 해서, 6월 8일에 (일제강점기에도 존재했던) 종로 야시장에서 학생들과 인쇄직공 노동자들을 동원해서 다 뿌릴 계획이었고, 나머지는 6월 10일 인산일에 나도 나가서 삐라를 뿌리고 만세를 부를 생각이었다, 그런데 체포됨으로써 모든 것이 수포로 돌아갔다.'라고 답했다고 합니다.
권오설은 3.1운동때 민족대표들과는 달리 직접 나가서 만세를 부를 생각이었는데 안타깝게도 하루 차이로 실패했습니다.

그렇지만 조선학생과학연구회 조직이 살아있었고, 이병립과 이선호가 각자의 역할을 잘 수행해서 6월 8일에 모여 대책회의를 하고 태극기 30장을 그립니다.
6월 9일에 명함인쇄기를 구해서 격문원고를 이병립이 쓰고 하루사이에 1만장을 만듭니다.
이 날 오후에 중앙고 중심으로 휘문, 연희전문 등에 분배를 합니다.
그리고 6월 10일 단성사 앞에서 태극기와 격문을 같이 뿌리고 만세를 외쳤습니다.
태극기는 일본에 대한 반역행위로, 격문보다 더 힘이 세고 명백한 상징성을 갖는 것으로 가로 21cm, 세로 18cm의 작은 종이에 급히 그려서 그렇게나마 성공시킨 것이 학생들의 힘이었습니다.
교수님께서, '권오설은 6.10만세운동의 기획자였으나 안정식에게 삐라를 준 것이 실책이었고, 박래원이 조금 더 버텼어야했다, 1930년대 독립운동가들이 24시간을 버텨서 이재유도 오랜 시간 도피할 수 있었는데 박래원이 평범한 인쇄직공이어서 그게 어려웠어서 이 점도 너무 안타까운 지점이지만, 이 사람도 밤새 고문 당하느라 무척 고생을 하긴 했을 테지만 안타깝다.'고 하셨습니다.
권오설도 고문을 심하게 당해서 옥에서 사망했고, 친척인 연희전문 학생 권오상 역시 고문이 너무 심해서 보석으로 출소 후 사망했는데 권오설보다 먼저 사망했다고 합니다.
1심판사가 무엇을 물어보든 이구동성으로 하는 말이 고문이 너무 심해서 경찰이 시키는대로 말했다고 모든 것을 부정하는 것을 예심 기록에서도 찾아볼 수 있을 정도였다고 하구요.
권오설이 붙잡힐 때 당황하지 않고 단념하고 두 팔 내밀고 여러분들이 나 잡느라 고생 많으셨다고 순순히 체포에 응하였고, 돌아가시고 안치되었던 녹슨 철제관은 경상북도독립운동기념관에 전시되어 있습니다.
사진을 찾아볼까하고 경상북도독립운동기념관 홈페이지에 들어가보니 친일 발언을 해서 임명 당시 반대가 극심했던, 검사출신 한희원씨가 아직도 관장인가보군요. 하아... 경북도지사 선거에서 민주당 후보가 당선되면 이런 일을 막을 수 있으려나요...

일제경찰이 봉분도 못 만들게 하고, 외부인 조문도 못하게 하고, 묘를 6개월간 감시했었다는데, 몇십년간 소문으로만 떠돌던 철제관은 진짜였다는 것이 묘 이장 과정에서 밝혀졌습니다.
사진 출처 : https://www.osos.or.kr/kwon5 권오설권오상기념사업회 홈페이지
해당 페이지에 강달영과 권오설이 고문 경찰을 고소했다는 내용도 나오는데요.
권오설이 체포된 후 공산당원 100여명 가까이 체포되었는데 이것이 조선공산당 2차 검거사건이고, 강달영은 바나나 장사로 위장하고 다니다가 7월 17일 체포되었다고 합니다.
다음 답사지는 세브란스의전 만세운동 현장이었습니다.
7. 세브란스 의전 만세운동 현장
주소 : 서울 종로구 돈화문로 4-1
순종의 대여가 이르자 세브란스의학전문학교(현 연세대학교 의과대학) 학생들이 격문을 살포하고 만세를 부른 현장으로 근처 청계천 관수교 부근에서 연희전문의 이병립과 박하균, 이런 분들이 삐라를 갖고 있다가 뿌리면서 만세를 부르고, 40명 정도가 체포되었다고 합니다.

고려공청과 관계된 학생조직의 지도부 5명 중 4명이 연희전문의 문과 동급생(2학년)이었고, 당시에 학생회가 있었던 유일한 학교여서 조직적으로 움직였던 것으로 보이고, 250명 재학생 중 50명이 잡혀가서 40명이 감옥에 갔다 나왔고, 조과연이 만들어질 때도 연희전문이 주도적이었고, 임원도 연희와 중앙 위주였다고 합니다.
권오설이 잡혀간 후 급박한 상황에서 연결된 네트워크가 통동계 하숙집이었다고, 서울학생들이 독립운동을 하지 않았다기 보다는 하숙집 네트워크에 끼지 못해서 참여할 수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고 하구요.
8. 신간회 본부 터
서울 종로구 종로 104번지 YBM어학원 앞

신간회 창립본부 터로는 가지 않고, 2년 후에 이전한 종로3가쪽 본부터에만 갔었는데요.
1919년 3.1운동 이후 세워진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내분에 시달리고, 1925년 조선공산당 역시 일제의 대대적인 탄압으로 와해되고, 1926년 6.10만세운동 이후 일제의 감시와 탄압이 거세졌을 때, 천도교와 동아일보계열의 자치운동 조짐이 나타나자, 비타협적 민족주의자들과 제휴 노선을 채택한 사회주의 진영과의 합의로 신간회가 조직되었습니다.
1927년 2월 15일 종로 기독교청년회관에서 회원 200명, 방청객 1,000명이 참석하여 창립대회가 열렸는데 처음 명칭은 신한회(新韓會)로 하려고 했으나 총독부에서 거절해서 줄기 간(幹)자를 써서 신간회로 명칭을 변경했는데, 당시 韓이 幹과 같은 뜻으로 쓰였고, 고목신간(古木新幹)이라는 말이 있다고 하는 홍명희의 제안에 따른 것이었습니다.
신간회는 조선일보 계열, 서북지역 기독교 세력, 천도교 구파, 한용운 등 불교계, 조선공산당계 인사들이 모여 발기인을 구상했고, 1927년 5월에는 여성운동계 좌우합작 조직인 근우회가 자매조직으로 출범했습니다.
1929년 11월 3일 광주학생운동이 발발하자 신간회는 진상조사를 위한 조사단을 파견하고 학생운동에 대한 탄압을 당국에 엄중 항의하고, 이 운동을 전국적으로 확신시키기 위해 12월 13일 민중대회를 개최하기로 하였으나 일제에 의해 신간회 중앙 간부들이 대거 검거되어 중앙조직은 허헌 집행위원장 체제에서 김병로 집행위원장 체제로 바뀌었습니다. 이후 신간회 노선이 눈에 띄게 온건화, 개량화되어 곧 신간회 해소론이 등장하기까지 했습니다.
신간회는 1927년 2월부터 1931년 5월까지 단일민족협동전선을 구축함으로서 좌우의 협력운동이 결실을 맺은 것이지만, 합법적 단체를 표방하고 출범해서 적극적인 독립운동을 전개하지 못했고, 내부에서 해소공작이 벌어져서 스스로 해체하게된 것이 한계로 남는 단체였습니다.
신간회에 대해 간략히 듣고 3.1운동과 6.10운동의 차이점에 대해서는 탑골공원으로 이동해서 설명을 들었습니다.
9. 탑골공원

답사 참여하신 분들이 같이 찍혀서 챗지피티한테 부탁해서 지웠는데, 탑골공원이 예전과 달리 무척 조용해서 놀라웠습니다. 암튼 손병희 선생의 동상 앞에서 설명을 들었습니다.
박래원이 6.10만세운동을 준비하면서 천도교측의 도움이 필요하다고 느꼈던 것 같고, 당시 천도교는 최린이 주도하여 자치운동을 모색하는 신파와, 권동진이 주도하여 자치운동을 반대하는 구파로 나뉘어있었고, 박래원은 구파 사람이었기에 권동진에 도움을 요청했는데 권동진이 만세운동을 하는 것에 대해 수락 혹은 묵인 정도는 했으나 실질적으로 도와준 것은 없었다고 합니다.
박래원은 지방으로 격문을 보내고, 천도교 지방 조직을 활용하고 싶어했는데 권동진이 말로는 자금지원이랑 생각해본다고 했었지만 결국 해주지 않았기 때문에 체포 후에 무사방면되었구요.
권오설은 조선공산당으로부터, 박래원은 천도교측으로부터 큰 도움 없이, 세력도 없이 모든 것을 다 걸고 고군분투했던 것이 안타깝다고 하셨습니다.
3.1운동은 후기 1편에도 언급되었듯 천도교의 적극적인 자금, 조직 지원과 기독교의 참여를 바탕으로 이루어졌는데요. 그 중에서도 50%는 손병희의 몫이라해도 과언이 아니었습니다.
우선 독립운동을 해야한다는 확고한 뜻을 갖고 있었고, 천도교 지방 조직도 갖고 있었으며 자금 5천원(현재의 5억)을 지원하여, 그 중 2천원을 현순이 상해로 가져가서 사무소를 차려 독립선언서 내용을 번역해서 해외에도 배포하고, 3천원은 각 지방으로 가는 사람들 여비로 나눠줬고, 천도교계 출판사인 보성사(현 조계사 자리)에서 독립선언서가 인쇄되었습니다.
2월 27일 저녁 7시에야 33인의 명단이 확정되어 7시부터 9시까지 2시간만에 활자를 맞추고 9시부터 11시까지 인쇄기 3대 가지고 2만 1천부를 찍었는데 그 와중에 종로경찰서 신철 형사가 와서 발각이 되었습니다. 보성사 사장 이종익이 신철 형사에게 바로 보고하지 말아달라고 읍소하고, 가회동 현재의 헌법재판소 뒤쪽에 살던 손병희 집에 뛰어가서 보고 하니 손병희가 5천원을 줘서 무사히 넘어가서 3.1운동이 가능했습니다.(당시 신철의 월급 40원)
신철의 최후에 대한 기사도 읽어보시면 좋을 것 같아서 가져옵니다.
https://www.hani.co.kr/arti/society/society_general/884123.html#cb
어떤 일이든 아슬아슬한 순간이 없을 수가 없고, 거사에 성공하기 위해서는 실행하는 사람과 도와주는 사람이 있어야하는데 6.10때 권동진이 도와줬으면 좋았으련만 당시에는 천도교 구파가 가난해서 돈이 없었고, 공산당 강달영도 돈이 없었지만, 다만 몇백원이라도 도와줬음 좋았을텐데 그것도 안 되었고, 3.1운동처럼 전국적인 만세 시위가 되지 않고 좌절된 것이 무척 아쉽고, 권오설의 심문 과정에서 지원이 없었다는 내용이 여러번 나왔다고, 3.1운동보다 규모가 작을 수 밖에 없었는데 계획대로 되었다면 3.1운동에 버금갔을 거라서 무척 아쉽다는 내용을 마지막으로 답사를 마쳤습니다.
개인적인 소감을 적어보자면, 어느 순간 어떤 선택을 하느냐에 따라 한 사람의 일생이 달라진다는 것은 당연한 일이겠지만, 일제강점기를 살던 사람들에게 그 선택은 훨씬 더 무겁고 가혹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독립운동을 한다는 것은 목숨을 내놓아야 가능한 일이었으니까요.
위에서 언급한 신철의 삶도 그런 복잡함을 보여주는 사례라고 느꼈습니다. 그는 원래 종로경찰서에서 약 10년간 근무하며 독립운동가들을 체포하던 친일 경찰이었습니다. 그 기간의 삶은 민족을 배반한 것이니 비판받아 마땅합니다. 그러나 거금을 대가로 삼았다고는 해도, 3·1운동 계획을 눈감아주어 거사가 이루어지도록 했고, 그 결과 몇 달 뒤 참혹한 죽음을 맞이했다는 점에서, 그의 인생 전체를 단순히 비난만 하기는 어렵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실제로 그를 두고 ‘일제 악질 형사의 마지막 애국’이라는 표현이 있을 정도라는 것도 인상적이었습니다.
한편, 독립선언서를 작성했던 최남선처럼, 독립운동에 참여했다가 이후 변절한 지식인들이 적지 않았다는 사실 역시 마음을 무겁게 합니다. 같은 시대를 살았지만, 각자의 선택과 그 결과는 달랐다는 점에서 여러 생각이 들었습니다.
또 한 가지 드는 생각은 사회주의 계열 독립운동가들에 대한 평가 문제였습니다. 이들에 대한 서훈이 이루어진 시기가 2005년 노무현 대통령 재임 시기였다고 하는데, 오랜 시간 이들의 공적이 제대로 평가받지 못하였고, 6·10 만세운동의 전모가 아직 완전히 밝혀지지 않은 상황이기도 하지만, 사회주의 계열 독립운동가들의 역할이 충분히 조명되지 못한 탓에 이 운동이 학생 중심의 활동으로만 알려져 있는 측면도 있는 것 같아 아쉬움이 남았습니다. 더 많은 자료가 발굴되고 사람들에게 많이 알려지고, 잊혀진 독립운동가들에게 서훈도 이루어지면 좋겠습니다.
잊지 않으려고 6.10만세운동 100주년 기념 축하메시지 신청도 지난 달에 미리 해두었는데요. 광화문에서 100주년 기념식이 열릴 예정이고, 100주년 기념우표도 발행될 거라고 합니다.
6.10만세운동에 대해 더 궁금하신 게 있다면,
권오설권오상기념사업회 홈페이지(https://www.osos.or.kr/home) 를 참고하시는 게 제일 좋을 것 같고,
6.10만세운동기념사업회 홈페이지(http://www.610manse.or.kr/?page_id=6162) 도 있으니 참고해주세요.
가을에 또 한 차례 같은 답사가 있을 거라고 하는데 그때는 답사 정보를 접하게 되면 다모앙에 공유하겠습니다.
긴 글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댓글 (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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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kita
05.04 · 125.♡.203.16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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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아기고양이
→ kita 작성자
05.04 · 223.♡.90.186
6월 10일 축하메시지에도 댓글로 링크를 달아두었습니다.
숙제 하나 끝낸 기분이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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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kita
→ 아기고양이
05.04 · 125.♡.203.16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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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달과바람
05.04 · 121.♡.91.44
우왁, 좋은 글 양이 길어서 나중에 찬찬히 읽어 보려 일단 스크랩합니다. ~ ^^
{emo:president-012.jpg} -
아아기고양이
→ 달과바람 작성자
05.04 · 223.♡.91.223
네, 6월10일 전까지 찬찬히 읽어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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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수현
05.04 · 211.♡.164.238
마지막글은 특히 먹먹하네요ㅠ 표지석에 쓰레기는 좀 슬프네요. 자세하게 알려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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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아기고양이
→ 수현 작성자
05.04 · 223.♡.91.223
네, 아무도 모르고 그냥 지나가겠더라구요. 하필 거기 노점이 있어서요. 쓰레기도 그렇고 안타까웠어요.
경찰과 헌병에게 둘러쌓여있는 상태에서 용기있게 만세를 외쳤던 현장인데 말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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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여름숲
05.04 · 58.♡.71.151
{emo:damoang-emo-003.gif}우와 정말 대단하세요.
그런데 답사중 녹음을 하셔서 녹취를 푸신건지 어떻게 이렇게 세세히 기록한 후기를 남길 수 있는지 궁금하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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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아기고양이
→ 여름숲 작성자
05.04 · 223.♡.91.223
대부분은 메모+일부 녹음+작성하면서 인터넷에서 찾은 자료 내용이 다 같이 들어있어서 후기 작성에 시간이 오래 걸려요.
이렇게 정리를 하지 않으면 금방 까먹을 것 같아서 노력해봤어요.

고양이집사능력시험보고 받아온 클립보드에 자료 출력해서 꽂아서 깨알같이 받아적어왔어요. 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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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수현
→ 아기고양이
05.04 · 211.♡.164.238
고양이 집사 능력 시험도 있군요.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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