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기고양이 (14.♡.156.50)
2026년 5월 18일 PM 10:02
4.3학교 답사 후기 - 1(서울 현충원 베트남참전 장병묘역, 4.3관련 인물 간략한 소개)
https://damoang.net/free/6283325
4.3학교 답사 후기 - 2(서울 현충원 독립유공자묘역, 가짜 독립운동가들, '일송정은 죄가 없다.')
https://damoang.net/free/6284991
4.3학교 답사 후기 - 3(서울 현충원 국가유공자 1묘역, 장군 1묘역)
https://damoang.net/free/6286375
4.3학교 답사 후기 1,2,3편에 이어 4편으로 들어갑니다.
문용채의 묘 - 장군1묘역 72호

만주국군 출신으로 해방후 육사를 나왔지만 충북 7연대, 춘천 8연대에도 적당한 자리가 없어서 군을 그만두고 제주 1구 경찰서장으로 부임하여 4.3 탄압에 앞장선 인물입니다.
오라리 방화조작사건(경찰과 우익 청년단이 평화협상을 좌절시키기 위해 벌인 방화와 학살 자작극)의 핵심멤버로 동아일보에게 특종을 주는데요. 기자를 현장에 태워가서 르포 기사를 쓰게 해줍니다.
봉기군이 인민이 사는 마을에 불싸질렀다고 왜곡, 호도하게 만들고, 현지 상황이 안 좋으니 만약의 상황에 쓰라며 민간인인 기자에게 권총까지 빌려줍니다.
이런 공작질에 능한 것을 김익열이 간파해서 항의하기도 했다고 하는데요. 김익열은 이 사람을 되게 뻔뻔했다고 회고했다고 합니다.
평북 정주 출생의 기독교인인데 묘비에 적힌 것을 보면 또 기가 찹니다.


믿음, 소망, 사랑으로 일생을 조국과 겨레를 위하여 그 몸과 마음을 바치신 고 문용채 장군 여기 잠드시다.
장군은 평북 정주 출생으로 중국에 망명하여 봉천 육군사관학교를 졸업, 조국광복을 위하여 투쟁하셨고 해방 후에는 창군에 공험, 군 발전에 크게 이바지 하셨다.
또한 장로로서 복음 사업과 교회 설립 및 사회봉사에 힘쓰신 고인의 깊은 신앙과 애국 애족의 높은 뜻은 천추에 길이 빛 날 정신이다.
이 인물은 봉천 육군사관학교(4년제)를 졸업한 것이 아니라, 봉천군관학교(2년제였으나 속성으로 6개월인 적도 있었음)을 졸업했고, 봉천 육사는 망명으로 가는 곳이 아니고 뽑혀서 가는 곳이라 이것만으로 왜곡이고, 만주국 헌병대 대위였고 친일인명사전에도 실렸는데 후손 역시 조상의 이력을 세탁한 걸로 봐야한다고 하셨습니다.
아, 묘비에 육군중장이라고 적혀있죠. 미군이 특채해서 다시 군인이 되었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문용채의 묘 옆에 민영구, 이국영 부부의 묘(장군1묘역 71호)도 있는데 이 부부는 두 분 다 애국지사이십니다.
친일파와 애국지사가 나란히 묻혀계시는 곳이 국립묘지라는 게 처음 듣는 얘기가 아니지만 들을 때마다 참 씁쓸합니다.
최석용의 묘 - 장군1묘역 60호



1903년 1월 28일 평북 백동에서 태어나 19세의 어린 나이로 압록강을 건너 만주와 중국 일대에서 조국광복을 위하여 몸바치기 시작하였나이다. 이국만리, 타국 땅에서 집도 한 칸 없이 한검추 최주봉 등 이름으로 20여성상을 항일타다 해방되어 귀국하였나이다. 1947년 육사 3기생으로 창군에 선봉이 되여 봉사하기를 또한 10여성상 주요 부대의 창설과 육성을 하시며 많은 공훈을 남기시고 도라가셨나이다. 평생을 나라와 겨레를 위하여 애쓰던 고귀하신 유지 후세에 영원토록 빛날것이오니 안심하시고 잠드시옵소서. (아랫부분은 잔디에 가려 잘 안 보입니다.)
최석용은 1928년 황포군관학교를 졸업하고 1930년대 조선혁명군(양세봉이 총사령관 No.1, 김학규가 참모장으로 No.2)에서 No.3 정도의 위치에서 항일 투쟁을 하던 인물로 조중연합작전을 펼칠 수 있도록 중국군을 설득 후 같이 싸우는데 역할을 했던(총사령관) 인물입니다.
그러나 1936년 말 동계 대토벌작전으로 포위돼서 항복한 후로 변절을 하였고, 게릴라 핵심멤버였던 지라 일본군의 앞잡이가 되어 무장투쟁 탄압에 이용되었다고 합니다.
1936년, 일제의 악랄한 토벌 속에서 독자 생존이 불가능해진 만주 독립군(민족주의 계열 등)이 코민테른의 '통일전선(이념을 초월한 연대)' 방침에 발맞추어, 중국공산당 주도의 거대 연합 부대인 '동북항일연군'으로 흡수·이전되어 항일 투쟁을 이어가는 전환기에 조선혁명군의 핵심 간부였던 최석용은 투항을 선택했던 것입니다.
최석용은 1940년 양진위(중국의 유명 무장 항일 투쟁가)의 토벌 작전에 중요한 역할을 했고, 양진위를 탈출시키려던 부관 최윤구(경북 청도 출신, 북의 혁명열사릉에 묻혔고 한국에서도 인정받은 독립운동가)도 전사했습니다. 양진위가 죽고 나서 부검을 해 보니 위에 풀뿌리만 있었다고 하는데 이 분들은 항복을 하지 않고 전사했다는 점에서 최석용과 대조적입니다.
최석용은 해방 후 늦게 귀국해서 육사에 들어갔는데 비문에 적힌 내용에서 오류를 찾아보자면 1919년부터 1936년까지 17년간 항일 투쟁을 하다 변절했는데 9년간의 일제 앞잡이 노릇은 묘비에 숨긴 것입니다.
비문에서 역사 왜곡을 하는 방법이 몇 가지 되는데 위에 언급한 문용채의 경우 사관학교를 나왔고 항일 투쟁을 했다고 이력을 부풀려서 왜곡하였고, 최석용은 변절 후의 이력을 숨기는 것으로 왜곡했다는 점에서 조금 다른 방식으로 왜곡하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위의 두 인물에 대한 김학규 선생님의 오마이뉴스 기사 링크도 같이 둘게요.(제가 들은 것보다 더 자세한 내용이 적혀있습니다.)
https://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2728302
김정호의 묘 - 장군1묘역 39호

토벌대 대장으로 4.3직후 제주에 파견되어 "악질 불량배가 제주에 와서 순박한 제주도민들을 선동했다, 좌익들이 육지 백정을 데려와서 우매한 제주도민들이 선동에 넘어갔다, 그래서 제주도민들과 외지인들을 분리하는 게 중요하다."며 폭도를 2천명이라고 표현했는데요. 미군정이 파악하기로 무장대는 350명에서 아무리 많아도 500명이 넘지 않았다고 하는데 훨씬 많은 수의 일반인을 폭도로 몰아서 죽였다고 합니다.
남로당이 백정을 동원해서 제주에서 일을 벌렸다는 왜곡된 인식을 심어주는 언론 인터뷰가 남아있는데 이는 당시 경찰의 황당한 인식을 그대로 보여주는 것이라고 합니다. 당시 무모한 탄압으로 문상길, 손선호(학살자 박진경 암살)을 높이 평가하는 언론기사가 있었고, 사형은 너무 심한 거 아니냐는 여론이 있었는데 실제 현실의 민중들 생각과는 동떨어진 인식을 경찰이 하고 있었다는 점을 알 수 있습니다.
채병덕의 묘 - 장군1묘역 12호

채 병덕 장군은 평양 출신으로 일찌기 군사학을 닦아 해방 즉시로 군문에 종사하여 1949년에는 육군 소장으로 승진되고 이듬해 육이오사변이 돌발되자 육해공군 총사령관으로 육군참모총장을 겸임하였다. 아군이 후퇴로 남하 전전하다가 하동 지구 전투에 참가하여 솔선 진두에서 지휘하던 중 적탄에 맞아 장렬한 전사를 하였다. 때는 7월 27일 향년 삼십육세이었다. 아 장군은 글자 그대로 일사봉공 그의 최후는 용감하고 장렬하였다.
라고 적혀있는데요.
일찌기 군사학을 닦은 곳이 어딘지 나와있지 않습니다만 일본육군사관학교를 나왔다고 합니다. 이쯤 되면 그냥 웃지요. ㅋㅋㅋㅋㅋ
군사학을 닦은 것은 사실이지만, 허술하게 써서 헷갈리게 하고, '일본 육사'를 빼서 퉁치고 넘어가는 수법이라고 표현하셨습니다. ㅋㅋㅋ
채병덕은 북한 프락치설이 돌 정도로 6.25 직전에 무능했었던 걸로 알려졌다고 하는데요. 이 부분은 너무 길어서 제가 옮겨적을 수가 없고, 관심 있는 분은 찾아보시면 좋겠습니다.
김용주의 묘 - 장군1묘역 186호

김용주는 1948년 5월 24일, 강경 진압을 주도하던 박진경 중령의 제11연대 3대대장(대위)으로 제주에 부임한 인물입니다. 이후 초토화 작전 시기 등을 거치며 무장대 잔당 수습과 진압 임무를 수행했습니다.
그는 훗날 회고하기를, 1948년 12월 31일 자로 법적 근거가 없던 불법 계엄령이 해제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자신과 부대원들은 스스로를 여전히 무소불위의 권력을 가진 계엄사령부이자 계엄사령관이라고 여기며 작전을 수행했다고 고백했습니다.
실제로 제주에서는 1948년 12월과 1949년 6~7월 등 두 차례에 걸쳐 불법적인 군법회의가 열려 수천 명에게 제대로 된 재판도 없이 사형과 징역형이 내려졌습니다. 김용주는 이 시기 작전 책임자로서 사형 집행에 깊숙이 관여했으며, 이때 억울하게 사형선고를 받고 총살당한 희생자들이 집단으로 묻힌 대표적인 장소가 바로 지금의 제주국제공항(당시 제주비행장) 서편 부지입니다.
또한 그는 잔당을 소탕하겠다는 명목으로 군인 1개 중대원을 민간인 옷으로 갈아입힌 뒤, 학교 교사나 면사무소 공무원, 농부 등으로 제주 전역에 위장 침투시키는 기만적인 첩보 작전을 폈습니다. 이 위장 첩보원들은 주민들 사이에 섞여 살며 군대에 대한 불평불만이나 무장대에 동조하는 말을 유도해 낸 뒤, 관련자들을 찾아내 대거 체포하고 학살하는 데 이용했습니다.
김용주는 말년에 이르러 "내가 제주에서 한 일(위장 스파이 작전과 강경 진압)이 있어서, 지금 제주도에 가면 유족들에게 맞아 죽는다"며 결코 제주 땅을 밟지 못했다고 회고했습니다. 자신이 저지른 무고한 민간인 학살과 가혹한 진압이 얼마나 큰 잘못이었는지를 스스로도 명백히 알고 있었던 것입니다.(이 부분은 제가 답사에서 적어온 내용을 제미나이가 정리해줬습니다. 후기가 길어지다보니 집중력이 떨어졌어요. ㅠㅠ)
박진경의 묘 - 54묘역 4판 2140호

평화협상을 맺었던 김익열이 해임된 후 배치되어 학살에 군을 동원한 인물로 30만이 희생되더라도 폭동을 진압해야한다고 했다죠. 그래서 9연대의 제주 출신 군인들이 탈영하거나 무장대에 합류하기도 했다고 합니다.
한달 보름동안 6천명을 체포하였고, 세 번 불렀는데 서지 않으면 총으로 쏴버리라고 했다고 하네요. 본격적 학살의 서막을 연 인물입니다. 그래서 문상길과 손선호에 의해 암살되었습니다. 문상길과 손선호가 사형을 당한 곳으로 추정되는 곳에 대한 후기는 다음 편에서 이어집니다.
박진경은 얼마 전 국가유공자로 등록 되었다고 해서 크게 논란이 일었다가 이재명 대통령께서 직접 검토 지시를 내리셔서 취소가 된 적이 있었는데요.
박진경이 사후에 무공훈장을 받았고, 무자격자가 국가유공자 신청을 했기에 절차상 하자가 있다고 하여 일단 국가유공자 등록은 취소되었지만, 사실 이 무공훈장을 받은 것부터 문제라고 합니다.
무공훈장은 6.25때 돌아가신 분들이 받은 건데 1948년 6월 사망한 박진경이 왜 이걸 받았는지 기록이 없다고 하고, 4.3관련으로 죽었는데 왜 이 무공훈장이 취소가 안 되는지도 아쉬운 일입니다.
이에 대한 권오을 보훈부장관이 입장을 밝혔다는데 참 답답하네요. 아래 링크에서 관련 기사를 확인하실 수 있습니다.
https://www.mediajeju.com/news/articleView.html?idxno=363266
박진경의 장례가 제1호 (최초의) 육군장으로 치러졌기에 육군의 역사를 뒤집기가 쉽지 않을 거라고, 성우회의 반발도 크고 육군의 역사를 부정해야하는 문제 때문이라는 의견도 있었지만 받아들이기가 어렵습니다.
김오령 중령의 경우도 순직에서 전사로 바뀌었고, 5.18 참여군들은 전사에서 순직으로 40여년만에 바뀌었다고 하는데 이재명 정부에서도 저항이 만만치 않기에 바로 잡기가 어려운 것 같다고 하셨구요.
박진경의 고향 남해에 동상이 있는데 그 뒷면에 역사왜곡이 심하다고 합니다.
남한에 침투하려고 호시탐탐 노리던 북한 괴뢰 세력이 4.3을 일으켰다고 서술하고 있고, 예전에는 4.3'반란'사건으로 불렸으니 역사를 누가 장악하고 주도하는지가 중요하다고, 당시의 주류가 이런 인식으로 사회를 주도했다는 걸 볼 수 있는 증거라고 하셨습니다.
찾아보니 동상 철거를 주장하는 목소리가 경남도민일보에 실려있네요. 이것도 참고 목적으로 둡니다.
https://www.idomin.com/news/articleView.html?idxno=2003061
정준철의 묘 - 54묘역 6판 1655호

단일 사건으로 가장 피해 규모가 컸던 구촌리 학살사건의 책임자로 6.25 전쟁 발발 이틀 후에 사망한 자라고 합니다.
김대중 대통령, 이희호 여사 묘소


김대중 대통령께서 제주 4.3의 진실을 밝힐 것을 대선공약으로 내세우셨고, 실제로 대통령이 되시고 나서 2000년 특별법에 서명하셔서 3년간 제주4.3사건 진상규명 및 희생자 명예회복위원회가 발족하고 2003년에 진상조사보고서가 발간되었습니다.
그런데 1998년 김대중 대통령의 CNN 인터뷰를 두고 국힘쪽에서 4.3을 왜곡하는데 김대중 대통령의 발언을 물고 늘어진다고 하는군요.;;

후기가 너무 길어진 관계로 김대중 대통령의 인터뷰 내용과 홍준표 전 저나라당(이름 자꾸 바껴서 외우기 귀찮아서 저는 이렇게 불러요.) 대표의 발언에 대한 오마이뉴스 기사의 링크는 아래에 두겠습니다.
https://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2420730
김대중 대통령 묘소에서 내려오는데 가까이에 창빈 안씨의 묘가 있었는데요.(사진 못 찍었어요.) 이 근처가 조선시대때부터 묘를 썼던 곳이라고 합니다.
양 옆에 김대중 대통령 묘소와 이승만 대통령 묘소를 두고 있는 명당이라고 하셨는데, 창빈 안씨는 중종의 후궁으로 선조의 할머니라고 하네요.(조선시대 역사에 아주 많이 어둡습니다.;;)
이승만의 묘
이승만의 묘소 사진은 안 찍고 헌시의 사진을 찍어왔는데 이 내용이 또 참 요즘 말로 신박하다고 해야할 지... 어이가 없습니다.

헌시
배달민족의 독립을 되찾아 우리를 나라있는 백성되게 하시고 겨레의 자유와 평등을 지켜 거룩한 나라사랑 불멸의 한국인 우리의 대통령 우남 리승만 삼가 금수강산 흘러오는 한강의 물결 남산을 바라보는 동작의 터에 일월성신과 함께 이 나라 지키소서.
이걸 새긴 저 돌도 하와이 앞바다에서 가져왔다고 하고 만든 건 1970년대 초 같다고 하셨는데요.
김대중 대통령의 묘 옆에 있던 시에는 민주주의에 대한 시가 있다고 합니다.
1970년대 초에도 백성 같은 소리를 하고 있었다니... 에휴... 시비도 인물 따라 가는 거겠죠.
이승만이 4.19 혁명 후에 하야해서 하와이로 망명을 가서 거기서 죽었는데 왜 현충원에 묻힌 것인지 그동안 참 궁금했는데요.
저런 헌시를 바치는 인물들이 있었기에 국내에 유해를 모셔야한다는 움직임도 있었나봅니다.
그래서 국장으로 장례를 치르고 국립묘지에 모시기로 했는데, 당시만 해도 국립묘지의 위상이 지금 같지 않았고(국립묘지가 생긴지 얼마 안 됐을 때라고 합니다.) 4.19혁명 관련 단체, 유족들이 강력하게 반발해서 국장 대신 가족장을 치르는 것으로 타협을 하고, 국립묘지에 묻힐 수 있었다고 합니다.
묘소 사진이 없지만 이승만의 묘는 500평 규모이고, 박정희의 묘는 1270평이라는데 공화국의 대통령이면서 임금 행세를 한 것이라고 평하셨구요. 앞선 후기 3편에서 박정희의 영구차도 보존되고 있다고 했는데 왕 노릇 했던 독재자들이 죽어서도 국립묘지에서 저러는 꼴을 보니 참 어처구니가 없습니다.
현충원 답사 후기는 여기까지이고, 긴 글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대전 현충원에 묻힌 4.3관련자들에 관한 기사 링크도 참고 삼아 같이 둘게요.
https://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3016331
4.3학교 답사 후기 5편은 문상길, 손선호 사형터에 관한 내용으로 이어집니다.
댓글 (4)
-
사사자바람연꽃
05.18 · 221.♡.34.113
-
아아기고양이
→ 사자바람연꽃 작성자
05.18 · 14.♡.156.50
그러게요. 친일 매국노들과 무고한 시민들을 학살했던 놈들 죄다 파내면 좋겠는데 말이에요.
지금 당장 내란청산도 지지부진하니... 참 답답한 노릇입니다.
-
Bbaboda
05.19 · 110.♡.205.40
감사합니다. 답사 하시고 내용 정리해서 글 작성하시고
덕분에 편하게 글 읽었습니다.
속이 부글부글 합니다. 언제 쯤 정리가 될까요.
그래도 한걸음 한걸음 나아가야겠지요.
-
아아기고양이
→ baboda 작성자
05.19 · 223.♡.74.40
네, 속이 부글부글할 일이 한 두가지가 아니더라구요. 끊임 없는 관심과 연대가 필요한 일이 많은데 쉽지가 않아서 이렇게 글로 남겨두고 한 번씩 보려구요.
댓글을 작성하려면 이 필요합니다.
내란당이 해체되면 친일 매국노들 파낼수 있지 않을까 기대 해봅니다.
당연한 일인데 당연하게 안되는 것이 참 뭐같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