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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년 7월 26일 PM 06:36
[기사 톺아보기] 통계가 잡은 혐오, 통계가 놓친 혐오

// '리센느' '홍명보' 언급 기사·게시물에도 지역 혐오 쏟아졌다
https://n.news.naver.com/article/006/0000136903
[기사 톺아보기]
통계가 잡은 혐오, 통계가 놓친 혐오
이 글은 AI(Claude)가 작성한 분석 글로,
기사를 바탕으로 더 다양한 시각과 깊이 있는 통찰을 나누기 위해 기획되었습니다.
바쁘시거나 관심이 없으시다면 편하게 넘어가셔도 좋습니다.
이 분석은 지역 멸칭을 원문 그대로 옮기지 않습니다.
다만 문제의 화법을 이름 지어 비판하기 위해 일부 표현은 불가피하게 인용합니다.
가리키기 위한 인용이지, 퍼뜨리기 위한 인용이 아닙니다.
1. 기사 이해 돕기
미디어오늘이 스타트업 언더스코어와 함께 온라인 댓글을 분석했다.
2026년 3월 19일부터 7월 6일까지 110일간이다.
네이버 뉴스, 디시인사이드, 유튜브 인기영상의 댓글이 대상이다.
328만여 건을 AI 분류기 'HateScore'로 판정했다.
두 사건이 축이다.
2026년 5월 스타벅스 '탱크데이' 논란, 6월 29일 배재고 야구부 조롱 응원이다.
두 사건 이후 지역혐오 댓글이 늘었다는 것이 기사의 결론이다.
용어 | 뜻풀이 |
|---|---|
일베 | 2010년대 초 형성된 극우 성향 커뮤니티. 특정 지역과 민주화 역사를 조롱하는 은어와 밈을 대량 생산했다. |
일베 '노'체 | 문장 끝에 노무현의 '노(盧)'를 기계적으로 붙여 고인을 조롱하는 화법. 경상도 방언의 '노'와 다르다. |
접미사 '충' | 벌레 충(蟲). 사람을 벌레로 격하하는 접미사. 맘충, 틀딱충, 급식충 등으로 확산됐다. |
물타기 | 쟁점을 흐려 책임을 희석하는 화법. "그냥 사투리다", "그냥 유행이다"가 대표적이다. |
여기까지가 기사의 뼈대다.
문제는 이 기사가 잰 혐오가, 실은 가장 잡기 쉬운 혐오라는 데 있다.
2. 기사가 밝힌 것과, 정작 놓친 것
구간 | 변화 |
|---|---|
전체 지역혐오 비중 | 스타벅스 이전 1.51% → 배재고 이후 2.99% |
뉴스 댓글(배재고 전후) | 2.77% → 6.25% 급증 |
사건 무관 기사만 별도 분석 | 지역명 기사까지 빼도 +2.77%p 상승 |
숫자는 성실하다.
그러나 이 분류기가 잡아낸 것은 '노골적 멸칭'이다.
개돼지, 홍어처럼 누가 봐도 혐오인 단어다.
이런 말은 세기 쉽다.
진짜 위험한 혐오는 통계에 잡히지 않는다.
그것은 평범한 문장 속에 숨어 있다.
'사투리'라 우기고, '유행'이라 둘러대고, '좋은 말'에 얹혀 다닌다.
분류기도 못 잡고, 사람도 더는 혐오라 느끼지 못한다.
이 글은 그 세 가지 위장을 파헤친다.
6.25%가 빙산의 물 위라면, 아래는 재지 못한 얼음이다.
그리고 물 아래가 배를 침몰시킨다.
3. 첫 번째 위장: '사투리'로 세탁된 일베 화법
리센느 멤버 원이의 '무섭노' 논란이 대표 사례다.
표면만 보면 방언 논쟁처럼 보인다.
그러나 이 논쟁의 구조 자체가 하나의 세탁 공정이다.
먼저 사실을 갈라야 한다.
'무섭노'는 방언으로 방어된다.
언어학자와 경상도 화자들은 동남방언에서 '노'가 의문과 감탄에 두루 쓰인다고 설명한다.
여기까지는 낙인이 부당하다.
문제는 '무섭노' 하나로 논쟁이 좁혀졌다는 데 있다.
같은 인물의 다른 발화, 이를테면 명사에 '노'를 붙인 '도시노' 같은 표현이 함께 지적됐다.
'도시노'는 의문문이 아니다.
명사 뒤에 기계적으로 '노'가 붙은 형태다.
이런 용법은 동남방언으로 설명하기 대단히 어렵다는 것이 전문가들의 지적이다.
바로 이 지점이 일베 '노'체의 정체다.
일베는 경상도 문법과 무관하게 표준말 뒤에 '노'를 기계적으로 붙였다.
그 '노'는 방언이 아니라 노무현 전 대통령을 겨냥한 조롱의 부호다.
2013년 한 분석에서 일베 게시물의 상위 주제어에 '노무현'과 '노(盧)'가 나란히 올랐다.
'광주', '종북'도 그 곁에 있었다.
즉 '노'체는 방언의 얼굴을 쓴 정치적 멸칭이다.
그러므로 방어 가능한 '무섭노'만 붙들고 싸우는 것은 우연이 아니다.
방어 가능한 사례를 앞세워, 방어 불가능한 사례를 함께 통과시키는 전술이다.
"사투리 가지고 왜 그러냐"는 한마디로, 진짜 일베 화법까지 덮어 준다.
이 물타기가 극우 밈을 양지로 끌어올려 정상화한다.
개인의 의도는 단정하지 않는다.
원이가 극우 사상을 가졌다는 증거는 없다.
또래 문화 속에서 무심코 익힌 말버릇일 수도 있다.
그러나 의도가 없다는 것과, 그 말이 무해하다는 것은 다른 이야기다.
누군가를 모욕하려 만들어진 말은, 내 고장 말이 아니다.
그 말을 고향 말로 받아들이는 순간, 조롱은 문화로 둔갑한다.
'그냥 사투리'라는 방패 뒤에서, 죽은 이를 향한 조롱이 매일 재생산된다.
이것을 말랑하게 넘겨서는 안 된다.
4. 두 번째 위장: 사람이 벌레가 되는 말, '충'
'충'은 벌레를 뜻하는 한자다.
이 접미사는 사람을 벌레로 격하한다.
시작은 '일베충'이었다.
곧 맘충, 틀딱충, 급식충, 진지충, 지균충, 기균충으로 번졌다.
이제 이 말은 초등학생의 일상어다.
아이들은 스스로를 '급식충'이라 부른다.
한 학부모는 아이가 노인을 '틀딱'이라 조롱하는 것을 듣고 충격받았다고 했다.
아이는 "다들 쓰는데 뭐가 문제냐"고 되물었다.
혐오를 하면서도 혐오하는 줄 모르는 상태, 이것이 둔감화의 완성이다.
'지균충'과 '기균충'은 특히 무겁다.
지역균형선발과 기회균등전형으로 입학한 동료를 벌레라 부르는 말이다.
사회적 합의로 마련한 균형과 기회를, 성적 하나로 짓밟고 동료를 공동체에서 밀어내는 심성이다.
'충'은 농담의 외피를 썼지만, 그 안에는 배제의 논리가 들어 있다.
사람을 벌레로 부르는 언어는 가볍지 않다.
학살을 연구하는 학자들은 '비인간화'를 대량 폭력의 전 단계로 꼽는다.
르완다에서는 학살 전에 이웃을 '바퀴벌레'라 불렀다.
상대를 벌레로 규정하는 순간, 그를 함부로 대할 심리적 허가가 생긴다.
'충'은 그 허가를 매일 조금씩 발급한다.
"그냥 유행어다"라는 변명이 가장 위험하다.
유행이라는 말은, 책임을 지울 주어를 지운다.
누구도 시작하지 않았고 누구도 책임지지 않는 혐오가 된다.
그렇게 벌레의 언어가 공기처럼 자연스러워진다.
5. 세 번째 위장: 좋은 말에 묻은 나쁜 값
가장 교묘한 위장은 좋은 단어를 훔치는 것이다.
자유, 독립, 태극기는 본래 모두의 것이다.
그러나 이 말들에 특정 진영의 혐오와 값이 덧칠되고 있다.
태극기가 가장 뚜렷한 예다.
태극기는 독립운동의 상징이었다.
임시정부의 모든 행사가 태극기에 대한 경례로 시작됐다.
6·10 만세운동에도, 광주학생운동에도 태극기가 함께했다.
일제는 태극기를 지닌 것만으로 독립운동가로 간주해 탄압했다.
그러나 2010년대 후반 이후 태극기는 특정 집회의 상징처럼 굳었다.
국민 전체의 국기가 한 진영의 깃발처럼 오염됐다.
'자유'라는 말도 진영어로 좁혀지고, '독립'과 '건국'의 서사도 편의대로 재단됐다.
숭고한 단어에 혐오의 값을 묻히는 일이 조용히 진행됐다.
이것이 위험한 이유는 위장 효과 때문이다.
혐오가 '자유'라는 옷을 입으면, 혐오가 아니라 신념처럼 보인다.
조롱이 '애국'의 깃발을 들면, 조롱이 아니라 충정처럼 보인다.
좋은 말이 나쁜 값의 방패가 되는 것, 이것이 가장 정교한 세탁이다.
우리가 지켜야 할 것은 단어 그 자체다.
자유는 남을 벌레라 부를 자유가 아니다.
독립과 태극기는 특정 진영의 소유물이 아니다.
좋은 말을 혐오에게 내어 주는 순간, 우리는 언어와 상징을 동시에 잃는다.
6. 왜 이 세 위장이 통계보다 무서운가
세 위장에는 공통 문법이 있다.
정상화와 위장, 그리고 '그냥 X일 뿐'이라는 방어다.
위장 | 방어 논리 | 숨는 실체 |
|---|---|---|
일베 '노'체 | "그냥 사투리다" | 고인을 겨냥한 기계적 멸칭 |
접미사 '충' | "그냥 유행어다" | 사람을 벌레로 만드는 비인간화 |
상징 전유 | "그냥 애국이다" | 좋은 말로 위장한 진영 혐오 |
이 세 가지는 분류기에 잘 걸리지 않는다.
'도시노'는 지역 멸칭 사전에 없다.
'급식충'은 자조처럼 보여 혐오로 분류되지 않기 쉽다.
'자유'와 '태극기'는 그 자체로는 아름다운 말이다.
그래서 6.25%라는 숫자는 오히려 우리를 안심시킨다.
통계는 소리치는 혐오를 잡는다.
그러나 진짜 무서운 혐오는 소리치지 않는다.
그것은 웃으며, 유행을 타고, 애국의 얼굴로 스며든다.
"우리는 혐오를 추적하고 있다"는 안도감이, 정작 스며드는 혐오를 못 보게 만든다.
그러니 이 기사의 진짜 한계는 이것이다.
가장 세기 쉬운 혐오를 세고, 가장 위험한 혐오는 세지 못했다.
그리고 세지 못한 혐오를, 세지 않음으로써 정상화에 일조할 수 있다.
7. 그러면 무엇을 할 것인가
비판은 대안을 향해야 한다.
위장을 걷어 내는 네 가지 원칙을 제시한다.
원칙 | 내용 |
|---|---|
이름을 붙여라 | "그냥 유행"이라는 익명의 방패를 걷고, 화법의 기원과 의도를 정확히 지목한다. |
물타기를 거부하라 | 방언과 일베어를 뭉뚱그리지 않는다. 방어 가능한 사례로 방어 불가능한 사례를 덮게 두지 않는다. |
언어를 되찾아라 | 자유, 독립, 태극기를 특정 진영에 내어 주지 않는다. 좋은 말은 모두의 것으로 지킨다. |
측정을 겸손히 | 통계는 시작일 뿐이다. 위장된 혐오는 맥락을 읽는 사람의 눈으로 함께 봐야 한다. |
언론의 몫이 특히 크다.
혐오를 세는 데서 멈추지 말고, 위장의 문법을 해부해야 한다.
방언을 존중하되 조롱은 조롱이라 불러야 한다.
그것이 온도계를 넘어 진단서를 쓰는 보도다.
8. 성인의 시선으로 맺으며: 이름을 바로 세우라
공자에게 제자가 물었다.
정치를 맡으면 무엇부터 하겠느냐고.
공자는 답했다.
반드시 이름을 바로 세우겠다, 정명(正名)이라 했다.
이름이 바르지 않으면 말이 순하지 않고, 말이 순하지 않으면 일이 이루어지지 않는다고 했다.
오늘의 위기가 바로 이것이다.
조롱을 '사투리'라 부르고, 벌레의 말을 '유행'이라 부르고, 혐오를 '자유'라 부른다.
이름이 뒤틀리자, 시비의 기준이 무너졌다.
맹자는 사람이 짐승과 다른 까닭을 측은지심에서 찾았다.
남을 벌레라 부르는 순간, 그 마음의 문이 닫힌다.
'충'의 언어가 무서운 것은 어휘가 아니라, 닫히는 마음이다.
이 기사는 혐오의 온도를 재 주었고, 그 노고는 값지다.
그러나 우리가 할 일은 그다음이다.
뒤틀린 이름을 바로 세우고, 좋은 말을 되찾고, 닫히려는 마음의 문을 다시 여는 일이다.
숫자가 우리를 놀라게 할 수는 있으나, 우리를 지키는 것은 이름을 바로 부르는 용기다.
이 분석 내용은 'Claude'이 작성하였으며, 원하시면 마음대로 퍼가셔도 좋습니다.
이 분석 글이 마음에 드셨다면 '짧게라도' 댓글 한 줄만 부탁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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