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료 조직은 왜 쿠데타에 따랐나? : 막스 베버의 「관료 지배와 정치적 리더십」 읽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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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포도포도왕포도 199.♡.208.22
작성일 2024.12.11 0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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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번의 친위 쿠데타를 보며, 책읽는당 앙님들, 다모앙 앙님들, 우리나라 시민, 전 세계 시민 공히 이 사건이 탈이성적이고 초현실적이라는 생각을 하셨겠죠. 저도 국가 수반이 내린 반헌법적인 지시를 군경으로 대표되는 정부 행정 조직이 한 건의 항명 없이 따랐다는 사실을 믿을 수가 없었습니다. 처음에는 민주주의 제도 자체에 문제가 있는 건가 하는 생각이 들어, 현재 붕괴하고 있는 민주주의에 관한 책을 읽어 보려고 했습니다. 스티븐 레비츠와 대니얼 지블랫의  『어떻게 민주주의는 무너지는가』나 『어떻게 극단적 소수가 다수를 지배하는가』와 같은 책 말입니다. 이런 마음을 먹고, 저녁에 먹을 카레를 만들며 잡생각을 하다가 문뜩 카이사르적 정치 또는 카이사르주의라는 단어가 떠올랐습니다.

카이사르적 정치는 간단히 말하자면 민주정체 하에서 독재자적 자질을 가진 정치 지도자가 자신이 가진 매력을 바탕으로 민주적인 또는 반민주적인 수단을 통해 국가 수반에 자리에 오르고 이를 통해 해당 국가를 권위주의적 정체로 변모시키는 행태의 정치를 말합니다. 막스 베버나 칼 마르크스 같은 학자들의 정체에 대한 저작에서 카이사르적 정치에 대한 언급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막스 베버는 '『행정의 공개성과 정치 지도자 선출 외』'에서 카이사르적 정치에 대해서 언급하고, 칼 마르크스는 『루이 보나파르트의 브뤼메르 18일』에서 언급합니다. 루이 보나파르트, 즉 나폴레옹 3세가 현대 친위 쿠데타의 아버지라는 점을 감안하면 후자의 책도 읽어 볼 필요가 있다는 생각이 문뜩 드네요.

여하튼, 카이사르적 정치라는 단어가 떠오른 후 든 생각은 현재 우리나라의 국군 통수권자라는 인물이 군사적 업적 또는 정치적 역량을 바탕으로 한 매력은 전무한 인물이라는 점입니다. 그래서 이 인물을 카이사르적 정치로 연결하는 게 적절하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보통 카이사르적 정치의 전형으로서 나폴레옹 보나파르트가 운위된다는 점을 감안하면 더더욱 그러했습니다. 이렇게 저렇게 잡생각으로 의식의 흐름을 이어가다가 이참에 막스 베버의 책이나 읽자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변변치 않은 이유로 책세상에서 나온 『행정의 공개성과 정치 지도자 선출 외』를 읽게 되었고, 이 책의 한 장인 「관료 지배와 정치적 리더십」에서 군경을 비롯한 정부 행정 조직이 이번 사건에서 보인 행태를 이해할 만한 조야한 실마리를 찾았습니다.

그래서 이 글을 적으며 제가 생각한 바를 정리해 보고자 합니다.

근현대 국가에서 관료가 지도자의 의지에 종속되는, 달리 말하자면, 정부 수반이 국회 공격을 하라고 하니 공격하는 시늉이라도 하는 이유는 두 가지 측면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하나는 관료가 자신에게 할당된 생산 수단을 소유하지 못한다는 점이고, 다른 하나는 관료의 합리성이 도구적이고 국소적이라는 점입니다.

먼저 생산 수단에 대해 생각해 봅시다. 농부는 토지를 생산 수단으로 가지고, 이 토지를 경작함으로써 얻은 재화로 생계를 유지 합니다. 기업가는 사업체를 경영함으로써 재화나 용역을 생산함으로써 얻은 재화로 경제 활동을 이어갑니다. 토지와 사업체는 소유할 수 있습니다. 토지는 자영농의 소유이고, 사업체는 주주의 소유이죠. 하지만 관료의 생산 수단인 행정 집행은 어떠한 경우에도 개인이 소유할 수 없습니다. 행정 집행은 사람이 아니라 직에 할당되는 유형의 생산 수단입니다. 관료는 관료 조직에 속함으로써 생산 수단을 위탁 받습니다. 자신이 생산 수단을 소유하지 못한다는 점으로 인해 관료는 자신의 생계와 경제 활동을 유지하기 위해 직의 부여에 결정적 영향을 미치는 권력자와 상급자에게 종속됩니다. 자신의 직을 유지하기 위해 표면상이라고 하더라도 권력자의 의지를 수용하고 그 명령에 따릅니다. 관료는 권력자와 상급자에게 자신의 쓸모가 유효할 때까지 직을 유지하고, 권력자과 그를 대리하는 행정 조직 내 자신의 상급자에게 '훌륭히' 종속되면 상위 직책을 맡게 됩니다. 이러한 조직의 계층 구조는 각 단에서 추진적으로 되풀이 되며, 관료 조직의 성원은 인습적이고 체계적으로 상급자에 굴종하여, 이 굴종이 조직의 미덕이자 문화가 됩니다.

속된 말로 하자면, 책상 물림만 하다가 관료 조직에서 나가면 뭐도 안 되는 존재인 관료는 밤을 뭐로 까라는 상사에게 이쁨을 받기 위해 밤을 뭐로 까는 시늉을 합니다. 그리고 열심히 시늉을 하다 보면 언젠가 윗대가리들이 비어 승진하게 됩니다. 배운 게 도둑질이라고 그 사람은 자신의 성공 사례를 전수한답시고 부하에게 밤을 뭐로 까라고 하는 상사됩니다. 이 작태의 연쇄로 관료는 까라면 까는 시늉을 미덕으로 삼게 되고, 조직 전체는 까라면 까는 시늉을 하는 문화가 자리 잡습니다. 

여기에 드는 의문은 까라면 까는 시늉을 하는 관료 조직은 어떻게 성과를 낼 수 있을까 하는 점입니다. 사슴 보고 저건 말이라고 하라니까 사슴을 말이라고 부르는 미친놈들로 이루어진 조직과 말을 말이라고 하는 사람들으로 이루어진 조직 사이의 경쟁을 전제해 보면, 양자의 규모가 차이가 크지 않는 이상, 전자가 후자에 이길 공산은 크지 않아 보입니다. 달리 말해, 군사용 철도를 전용해 유대인들 절멸 수용소에 옮기는 놈들에게 군사용 철도를 군사용 철도로 쓰는 군대가 질 수는 없는 겁니다. 덜 효과적인 조직과 효과적인 조직 사이의 경쟁에서 후자가 승리하면, 승자의 모방, 확산됩니다. 프로이센 왕국이 나폴레옹 전쟁, 보오전쟁, 보불전쟁에서 승리하자 전 세계 군대에서 참모 제도가 수용된 바와 마찬가지로 말입니다. 과거의 사례에서 배우고, 그 사례에서 검증 가능한 방식으로 반복되는 인과 관계를 포착해 재현하는 사고 방식, 즉 과학적 사고의 토대가 되는 합리성이 모방됩니다.

국가 행정 기관이든 사기업이든 관료 조직은 역사적 성패에 직간접적 영향을 받아 조직을 건사할 수 있을 정도의 합리성을 갖춥니다. 행정 집행이라는 생산 수단 또한 그러합니다. 그런데 문제는 이 합리성이 조직의 일을 수행하기 위한, 타 조직과 경쟁하는 데 승리하기 위한 효과를 담보하기 위한 도구로서의 합리성이라는 점입니다.

예를 들어, '제'가 2차 세계 대전 당시 나치 독일의 철도청에 일하는 관료라고 해 봅시다. '저'의 인생 목표는 나름 이름을 날릴 말한 사업을 이루어 권력자의 눈에 들어 출세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저'에게 주어진 일은 독일 본토와 점령지 전역의 물류를 효율화하는 일입니다. '저'는 서류 조사와 면담을 통해 폴란드에서 우크라이나로 이어지는 철도의 궤간이 달라 병목이 발생한다는 사실을 인지하게 되었습니다. '저'는 이 문제의 원인이 궤간이 달라지는 지점에서 '물자'를 인력으로 옮겨야 철로 운송이 가능하기 때문이라는 점을 확인하고,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러시아와 서유럽 연결 철도의 사례 조사한 후 기차의 궤도 폭을 손쉽게 교체하는 시설을 배치하면 큰 개선을 이룰 수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고 궤도 폭 교체 시설을 각 요소에 배치합니다. 이 조치를 통해 기차에 실린 '물자'를 사람으로 써 다른 기차로 일일이 옮기지 않고, 기차의 궤도 폭을 바꾸어 바로 '물자'가 실린 기차 그대로 국경을 넘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 조치로 아우슈비츠로 이송되는 유대인은 하루 6000명에서 14000명으로 늘었고, '저'는 이 공로로 '총통 각하'의 특별 지시로 철도청장이 되었지만, 전후 이 공로는 인류에 반한 범죄로 인정되어 저는 교수형을 당하게 됩니다.

도구적 합리성, 달리 말해 도구적 이성은 목적을 이루기 위한 수단이며 조직을 초월한 요소를 고려하지 않습니다. 상기 예에서 '저'라는 인물은 주어진 일인 물류 개선을 합리적으로 달성했습니다. 인간의 존엄 같은 건 고려하지 않았습니다. 까라면 까는 시늉을 하는 조직 문화 속에서 성과를 내기 위해 도구적 이성을 사용하는 관료 조직의 합리성은 그 유형의 조직 내에서만 통한다는 점에서 국소적입니다. 이런 조직의 합리성은 인습적 논리 체계에 기반을 두고, 이 체계와 대립하는 논리 체계를 거부합니다. 민간에서 처럼 해요체를 사용하면 군대에서는 쪼인트가 까이는 바와 같죠. 촌지가 당연한 사회에서 촌지를 받는 선생은 촌지를 받지 않는 선생은 '빨갱이'입니다.

베버의 「관료 지배와 정치적 리더십」을 읽으며, 생산 수단과 분리되어 있는 관료에 대한 기술이 저에게 큰 영감을 주었습니다. 국회 공격 명령에 군경이 따른 이유는 군경의 조직에 민주적 논리가 요구되지 않았기 때문이구나 하는 생각이 들더군요. 상명하복을 조직 문화로 갖는 관료 조직 속에서 요구되는 이성의 부림은 민주정을 유지하기 위한 이성이 아니라 상사 말 따라 효과적으로 사람 때려 잡는 이성으로 시작해서 결국 인습으로 자리 잡았기에, 국회 공격이라는 민주정의 정체를 공격하는 명령에 따랐던 거죠. 다행히도 이 명령이 실패한 이유는 우리가 의무 교육을 거쳐 함양한 민주 교육이 도구적 이성에 승리해 군경을 머뭇거리게 하고 시민들을 국회로 나아가게 했기 때문입니다. 이런 점에서 세간에서 백수행 직행 열차로만 취급되던 인문학의 역할이 보이니 문돌이로서는 흐뭇하네요.

이렇게 난잡하게 글을 쓰고 보니, '도구적 이성'이나 '하비투스'에 대해 공부를 해야 하겠다는 생각이 드네요. 시간이 되면, 『계몽의 변증법』이나 부르디외의 책을 읽어야겠습니다.

벼리 없이 되는대로 적은 글을 읽어 주셔서 감사합니다.

댓글 5

광나라님의 댓글

작성자 광나라 (58.♡.108.61)
작성일 2024.12.11 13:17
와 어찌 이리 잘쓰시는지 잘 읽고 갑니다

포도포도왕포도님의 댓글의 댓글

대댓글 작성자 포도포도왕포도 (199.♡.208.23)
작성일 2024.12.11 19:22
@광나라님에게 답글 댓글 감사합니당. 과분한 칭찬에 몸 둘 바를 모르겠습니당.

cuverin1님의 댓글

작성자 no_profile cuverin1 (14.♡.16.222)
작성일 2024.12.11 21:24
좋은책 감사합니다.

포도포도왕포도님의 댓글의 댓글

대댓글 작성자 포도포도왕포도 (199.♡.208.37)
작성일 2024.12.12 20:14
@cuverin1님에게 답글 『행정의 공개성과 정치 지도자 선출 외』는 강연을 옮겨 적은 투로 되어 있어, 읽기 수월해영. 물론 백여 년 전에 글이라서 역자 주만으로 온전히 제공되지 않은 배경 지식이 읽는 데 걸림돌이 되긴 하지만영. 그래도 사회학의 기틀을 잡은 막스 베버의 글을 쉽게 읽을 수 있는 기회이니, 읽어 보실 만하다고 생각합니당.

가짜힙합님의 댓글

작성자 no_profile 가짜힙합 (219.♡.224.189)
작성일 01.01 14:28
비슷한 문제의식을 가지고 '예루살렘의 아이히만' 을 읽었으나 부족한 문해력으로 고생만 하고, 명확한 해답을 구하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오히려 이 글을 읽고, 해답을 구한 느낌이라 너무 감사한 느낌이네요.
시간 될 때 언급해주신 책도 읽어봐야겠습니다.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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