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한 단어 - 만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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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no_profile 하늘걷기 121.♡.94.37
작성일 2024.09.06 11: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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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 눈을 떴을 때.

너무 배가 고팠다.

그래서 주변의 것들을 조심스럽게 먹기 시작했다.

풀은 맛이 없었다.

작은 벌레는 입에 톡 터져서 맛있었다.

또 곤충들은 씹는 맛이 있었다.

몸이 커지기 전까지는 지겹게 벌레와 곤충만 먹었다.

그러다가 처음 먹은 짐승이 작은 생쥐였다.

생쥐의 뾰족한 앞니와 빠른 움직임은 너무나 위협적이었다.

하지만 결국 승리하고 그 뜨거운 피를 마시게 됐을 때 큰 만족감을 느꼈다.

그렇지만 그 만족감은 오래가지 못했다.

더 많은 피와 고기를 내 몸이 원했다.

쥐를 계속 먹으며 몸을 키우고서 토끼와 작은 짐승들을 먹었다.

내가 잡은 짐승의 뼈다귀를 뜯어 먹으러 온 새들도 잡아먹었는데 새들은 덩치보다 먹을 게 적었고 깃털과 뼈가 이에 너무 꼈다.

하지만 가끔 먹기에 좋은 별미였다.

한참 후에 늑대 한 무리를 잡아먹었을 때는 죽을 뻔했다.

죽음의 문턱에서 나를 살린 건 혀가 델 정도로 뜨거웠던 늑대의 심장이었다.

피와 고기는 내 만족감과 허기를 채워주기도 했지만 내 몸을 치료해 주기도 했다.

죽을 위기를 극복한 나는 더 강해졌다.

내가 살던 작은 숲과 산에서는 더 만족감을 주는 상대가 없었다.

안전한 이곳을 떠나기는 싫었지만 나는 그저 생존만을 위해 살 수는 없었다.

공허했고 매일 힘들었고 소화도 잘되지 않았다.

결국 이곳을 떠나기로 했다.

작은 숲에서 큰 숲으로 작은 산에서 큰 산으로 옮겨 다녔다.

짐승들을 아무리 많이 잡아도 만족감은 길지 않았다.

그러다 어느날 그것들이 나타났다.

처음에는 작은 꼬챙이와 가시를 날리는 이상한 동물들이 공격해 와서 통째로 삼켜서 씹었다.

너무 맛있었다.

이것들은 인간이라는 동물이었다.

얼마 후 단단한 껍질을 가진 인간들이 나타나서 말을 타고 달려들었다.

역시 맛있게 먹었다.

인간들은 참 특이했다.

다른 동물들은 나를 보고 도망가기에 바빴는데 인간들은 오히려 나를 찾아와서 죽었다.

그러면서도 저항하는 게 먹는 재미가 있었다.

이렇게 알아서 찾아오고 잡아서 먹는 재미를 주는 동물은 처음이었고 그래서 그런지 만족감도 컸다.

인간들은 끊임없이 찾아왔다.

수백 마리가 내 입으로 알아서 들어왔고 그 수가 점점 불어나서 수천 마리가 모였다.

수천 마리를 먹고 나자 인간들은 더 이상 나를 찾아오지 않았다.

다른 동물들은 맛이 없었고 인간들은 아무리 기다려도 찾아오지 않아서 배가 고파졌다.

나는 직접 인간들을 찾아갔다.

인간들은 작은 상자와 큰 상자에 들어가서 살고 있었다.

모여서 저항하던 큰 상자를 무너트리고 인간들을 삼켰을 때는 전에 없던 만족감을 느꼈다.

이제 나는 인간들이 모인 큰 상자들을 찾아다녔다.

높은 산에 숨어도 깊은 땅굴을 파고 숨어도 나는 찾아가서 먹었다.

인간들과 비슷한 엘프와 드워프, 오크들도 독특한 맛이 있었다.

나는 다 똑같은 인간인 줄 알았는데 자기들끼리는 서로 다르다고 하는 것 같다.

인간들을 먹을수록 만족감은 커졌고 그와 함께 내 몸도 커졌다.

모든 인간을 다 먹었다.

이제는 살아 있는 어떤 동물도 없다.

벌레도 사라졌다.

배가 고팠다.

맛없어서 먹기 싫었던 풀을 먹기 시작했다.

풀을 다 먹은 후에는 흙과 물을 먹었다.

내가 살던 땅덩어리를 먹기 시작했다.

모든 걸 다 먹자 시커멓고 공허한 어둠만 남았다.

배가 너무나 고팠다.

나는 내 꼬리를 먹기 시작했다.

내 살을 뜯어 먹는 건 고통스러웠지만 너무 맛있었다.

목구멍을 넘어가는 뜨거운 내 피가 주는 만족감은 지금까지 먹은 무엇보다 더 큰 만족을 주었다.

내 거대한 몸은 너무나 커서 먹는 데 시간이 오래 걸린다는 것도 좋았다.

만족감 속에 정신을 차려보니 내 몸을 다 먹었고 아무것도 없는 공허한 어둠만 남았다.

배가 고팠다.

나는 어둠 속에서 내 온 힘을 다해서 알을 낳았다.

처음으로 먹지 않고 무언가를 내놓은 것이다.

큰 만족이 느껴지면서 내 정신은 흩어져갔다.

시커먼 공간에 내 알이 있었고 그 위에 먼지들이 모이기 시작했다.

오랜 시간 동안 먼지가 모이고 땅과 물이 만들어지고 그 안에서 풀이 자라기 시작했다.

나중에 벌레들이 짐승이 자라고 인간들이 가득 찰 때쯤 나는 다시 태어날 것이다.

큰 만족감을 기대하며 나는 모든 걸 잊고 잠이 들었다.

댓글 2

어디가니님의 댓글

작성자 어디가니 (210.♡.254.193)
작성일 09.06 14:13
잘 쓰셨습니다. 순환하는 천지창조 신화 같군요.

벗님님의 댓글

작성자 no_profile 벗님 (106.♡.231.242)
작성일 09.09 10:58
"이번에는 얼마나 많은 희생이 뒷따라는가?"
"지난 번 보다는 덜 합니다. 많이 줄어들고 있어요."

"시간도?"
"네, 조금씩 인지하고 있는 듯 합니다."

"그래, 잘 됐구먼."
그들은 투명한 창 넘어 현란한 색과 쉼없이 변화하는 형상, 정적과 폭발음을 반복하는 그것을 보고 있었다.

"깨우치려면.. 아직 멀은 거겠지?"
"네, 적어도 수 십 번은 더 반복되지 않을까 생각됩니다."

"그래.. 썩 나쁘지는 않은 경과로구먼."


잘 쓰셨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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