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프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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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도 지하철. 스크린 도어가 열리기도 전에 나는 서서히 속도를 줄여가는 지하철 창을 통해 빈 자리를 탐색한다. 승패는 서너 정거장 내 결정된다. 이 동안 자리를 확보하지 못하면 2시간의 퇴근길은 고행길이 될 뿐이다. 오늘은 고행길이 되려나 보다. 여전히 덥고 습한 날씨 때문에 체취와 땀을 의식해 되도록이면 서로 닿는 것을 피해본다. 장애물 피하기 미니 게임을 하듯 몸을 삭삭 놀려 에어컨 바람이 드는 공간으로 스며든다. 서 있을 공간을 확보하자 내 앞에 앉아 있는 사람의 거동을 슬쩍슬쩍 살피며 폰에 집중한다. 폰과 소음제어 기능이 있는 이어폰이면 나는 금세 온라인 공간으로 전송된다. 유체이탈된 나는 어찌된 일인지 온갖 생활 소음으로 가득찬 온라인 속을 거닐며 기웃거린다. 최대 60초의 의식이 교차로 노란 점멸등처럼 깜빡거린다. 나는 2시간 동안 60초의 정신 워프를 감행한다. 매일 반복되는 이 여행은 내 뇌가 얼마나 감당할 수 있을지는 모르겠다.
이런 나를 중력의 세계로 강력히 당기는 힘이 발생했다. 뜬금도 없이, 예고도 없이 내 앞에 빈자리가 출현한 것이다. 이 빈 공간에 강력한 중력장이, 아(亞) 블랙홀급 중력장이 발생해서 나는 빨려들듯 착석에 성공한다! 이 중력장에 영향을 받은 몇몇 사람들이 있었지만, 강력의 크기는 둘 사물의 거리에 반비례하므로 나의 승리는 합법칙적이었다. 그렇게 나는 남의 시간 동안 온라인 세계에 더 안전하고 깊숙히 빠져들 수 있을 것이다. 라는 기대와는 달리 내 접혀진 무릎은 강력한 탄성으로 빳빳하게 펴지고 말았다. 지하철 좌석의 그 견고함과 단단함이 아닌, 물컹하면서도 열기가 느껴지는 무엇인가가 내 허벅지 뒤에 감지된 것이다. 이건 뭔가, 단백질과 지방을 주 성분으로 하는 유기체인 듯한 이건 대체? 튕겨져 오르듯 서며 상체를 틀어 좌석 쪽으로 시선을 돌린다. 분명 방금 전까지만 해도 강력한 중력장을 발생시킨 그 "빈자리"는 이미 "빈자리"가 아니었다. 굳게 닫은 눈꺼풀과 가슴 앞에 단단히 맺은 팔짱은 이미 세계와의 단절을 선언하고 있다. 그 단절된 세계에는 나란 존재를 담을 어떤 빈자리도 허용하고 있지 않다. 다만 하늘거리는 원피스가 덮힌 허벅지만이 상대적으로 유화적인 자세를 취하고 있을 뿐이다. 합법칙적이던 결과는 발생하지 않고 나를 치한으로 몰지 않은 그 행성에 감사하는 마음을 담아 서둘러 자리를 옮긴다.
벗님님의 댓글
날카로운 음성의 나의 세계를 무너뜨린다. 절대 무너지지 않을 철옹성이 이렇게 나약하게..
"아저씨! 지금 뭐하시는 거에요!"
"네.. 네?"
"지금 억지로 제 무릎에 앉으신 거죠?"
"아.. 아..아닙니다!"
"지금 도망가시는 거에요?"
"아뇨, 아.. 아니.. 죄.. 죄송합니다."
공간이 열렸다. 걸음 하나 때기 어려울 만큼 빼곡하게 사람들이 가득했던 그 공간이,
홍해가 갈라지듯 그 여인과 나 사이의 공간이 열렸다.
누구도, 한 마디도 없었다. 가득했으나 아무도 보이지 않았다.
"사과 안하시나요?"
"네.. 네.. 죄송.."
"그걸로는 부족해요! 내가 지금.. 내려요. 이번 역에 같이 내리세요."
"네.. 네? 아니.. 그렇게 까지.."
그렇게 시작되었다. 인연이었을까, 악연이었을까.
정작 다음 역에 내린 그녀는 목이 마르다고 했다. 커피가 마시고 싶다고 했다.
잘 쓰셨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