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四季(Le quattro stagion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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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어디가니 210.♡.254.193
작성일 2024.09.13 08:53
분류 살아가요
88 조회
2 추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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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아침, 문득 생각나서 비발디의 '사계'를 찾았습니다. 폰에 저장되어 있으려니 했는데 없더군요. 결국 아쉬운 대로 유투브에서 찾아 플레이를 해놓고 이렇게 글을 쓰고 있습니다. 가만히 책상에 앉아 골몰해 보아도 내 안의 어떤 생각이, 어떤 흐름으로, 어떤 감정에 이르러 이 곡을 듣고 싶다는 마음에 이르렀는지는 모르겠더군요. 그저 어릴 때 기억만을 다시 반추하게 되었습니다.


제가 비발디의 '사계'를 처음 들었던 것은 아마 중학 1학년 무렵이었던 같습니다. 당시 음악 감상, 더구나 클래식 음악 감상이란 상층 문화였습니다. 물론 저 같은 노동계 하층민 ... 아, 유투브는 광고가 ... 자녀가 접할 수 있는 수준이 아니었죠. 게다가 저는 책을 봤지 음악을 잘 듣던 아이도 아니었고요.

어느 토요일이었을 겁니다. 오전 수업을 마치고 빈집에 돌아왔죠. 문 닫을 때마다 바람 소리만 나는 빈집에서 혼자 밥을 챙겨 먹는 게 일상이었습니다. 주변 아이들 모두가 그렇게 지냈으니 유난히 슬플 것도 외로울 것도 없는 평범한 일상이었죠. 찬장에서 라면을 찾아 라면 물을 올려두고 물이 끓을 동안 해적판 만화책이라도 보려고 방으로 돌아왔습니다. 그날 우연히도 형 책상에서(책상은 형만 가지고 있었죠) 못 보던 카세트 테이프를 발견했습니다. 라디오 방송을 녹음하거나 정식 음반을 복제하던 공(空) 테이프가 아니었어요. 정식 라벨이 붙어 있는 당당한 카세트 테이프. 낯선 말들로 가득차 있는 레이블이 요상스럽기까지 했죠. 막연한 호기심에 안방에 있던 카세트를 가져와 테이프를 틀었습니다. 상도 펴지 않고 방바닥에 두꺼운 책 하나 깔고 라면 냄비, 그 옆에 오래된 신 김치를 놓고 냄비 뚜껑에 면을 담아 허기를 에우기 시작했죠. 부드러운 바이올린 소리 ... 너른 들판이, 그 들판 어느 품이 깃들어 잔잔히 흘러가는 시내 ... 그런 것들이 연상되었습니다. 라면 빠는 소리와 함께 음악은 봄을 지나 여름으로 넘어가시 시작했습니다. 웬지 모른 감정이 아랫배에서부터 스멀스멀 올라왔습니다. 결국 어처구니 없게도 라면을 먹다고, 그러다가 치받아오르는 격정에 입에 물고 있던 면을 쏟아내며 울고 말았습니다. 라면 냄비를 앞에 놓고 꺼이꺼이 통곡하고 있는 동안에도 한편으로는 그 맥락을 알 수 없는 감정의 흐름이 당혹스러웠습니다. 한참을 울다가 감정이 추스려질 쯤엔 가을에서 겨울로 넘어가고 있었을 겁니다.


이런 당황스러운 기억이 있는 비발디의 '사계'를 왜 갑자기 듣고 싶어졌을까요?





울고 싶은가?


댓글 3

두아이아빠님의 댓글

작성자 no_profile 두아이아빠 (218.♡.34.60)
작성일 09.13 10:11
저는 비발디 사계 중에서도 겨울의 휘말아치는 그 느낌을 너무나 좋아합니다.

어디가니님의 댓글의 댓글

대댓글 작성자 어디가니 (210.♡.254.193)
작성일 09.13 10:28
@두아이아빠님에게 답글 저는 여름과 겨울 모두 좋아하는데 이 부분에서 감정적으로 고조되는 느낌입니다. 그런데 이현우 '헤어진 다음날'이 히트한 후론 겨울 부분은 듣다가 다른 멜로기가 연상이 되어 몰입에 방해를 받더군요. 물론 이현우 씨의 노래도 좋아합니다.

벗님님의 댓글

작성자 no_profile 벗님 (106.♡.231.242)
작성일 09.13 10:30
고등학교 다닐 때 같의 반 친구 중에 참 성격이 선하고 좋은 친구가 한 명 있었습니다.
당시의 저의 집안 형편 상, 음악을 듣는 그런 취미 생활 같은 건 꿈도 꿀 수도 없었습니다.

어느 날, 이 친구가 이어폰을 꼽고 뭔가를 듣고 있는데
귀에 꼽은 이어폰을 계속 톡톡톡 치는 겁니다. 궁금했습니다. 왜 그러는 거지?
물어봤더니, 이어폰를 건들면(주변에 잡음이 감지되면) 볼륨이 더 크게 나오게 된다고 하더군요.
와.. 그런 게 되는 이어폰이 있다는 걸 처음 알았습니다.

이 친구를 통해 새로운 기술들이 적용되어 있는 기기들도 잠깐씩 써보게 되기도 하고,
새로운 문화를 접하게 되기도 했습니다. 처음 놀러갔을 때 LP(레이저 디스크)도 처음 봤습니다.

좋아하는 걸 보고 싶고 알고 싶어서, 타의가 아닌 자의로 공부하고 이렇게 채득된 덕에,
번역을 거치지 않은 직수입된 일본 컨텐츠를 보며 웃고 즐기는 모습을 보며 생소하기도 하고,
멋지기도 했습니다. 자신이 좋아하는 걸 즐기는 거였지, 뭔가 티를 낸다던가 하는 그런 게 전혀 없었습니다.

그 친구를 알게 되며 '음악을 듣는 것'이 취미가 될 수 있다는 걸 알았습니다.
저도 뭔가 조금 제대로 듣고 싶어서 돈을 모으고 용산 세운상가에서 가서 AIWA 카세트를 샀습니다.
무려 오토리버스가 되는 녀석이었습니다. 그 후에 몇 개의 카셋트 테이프를 처음 사서 들어봤습니다.
그 중 생각나는 앨범 하나가 조수미의 앨범이었습니다. 와.. 옥구슬이 굴러간다는 게 그런 거더군요.
이제는 귀가 점점 높아져서 어떨지 모르지만, 그 시절 그 감흥은 잊혀지질 않습니다.

잘 지내고 있을까요, 내게 음악감상을 알려줬던 그 멋진 친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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