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쓰기] 오늘의 한 단어 - 마지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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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no_profile 하늘걷기 121.♡.94.37
작성일 2024.09.18 19: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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늘 언젠가는 마지막이 있을 거로 생각해 왔지만 그게 오늘일 줄은 몰랐다.

 

당연히 세상이 망했으니 언제 죽어도 이상하지 않았지만, 나는 대비를 해왔다.

외진 산에 작은 집을 지어 놓고 집 아래에는 집보다 더 큰 쉘터를 만들었다.

 

총기를 구할 수 없는 대한민국이지만 밀수로 불법무기들을 들여왔는데 당시의 국가 행정이 많이 무너져 있던 시기라 가능했다.

 

나는 세상이 망할 줄 알았다.

 

누군가는 환경 오염, 온난화, 불안한 세계 정세, 늘 시끌벅적한 국내 정치를 이유로 세상이 망한다고 이야기했다.

 

하지만 그건 진짜 망할 거라고 믿는 게 아니라 그전에 조심하자는 이유에서 떠들었던 것이고 나는 그런 게 아니다.

 

중학교 때 교통사고가 난 적 있었다.

조금 크게 나서 병원에 입원하고 수술도 했지만, 생명이 위독할 정도는 아니었다.

 

어지러움을 느끼고 코피가 쏟아져서 머리에 문제가 있는 줄 알고 MRI를 찍었는데 그 순간 머릿속에서 말소리가 들렸다.

 

―세상이 망한다! 준비해라!―

 

처음에는 머리에 문제가 있는 줄 알고 여러 검사를 더 해봤지만, 아무런 문제가 없었다.

 

머릿속 목소리는 다른 말 없이 세상이 망하니까 준비하라는 경고를 계속 반복했다.

내가 공부할 때는 끝없이 반복하다가 체육 시간에 움직이기 시작하면 목소리가 멈췄다.

 

여러 번 시험 해 보니 신체를 단련하면 멈춘다는 게 명확했다.

 

그날 이후로 공부에는 손 놓고 운동을 시작했다.

목소리는 구기종목보다 격투기를 더 선호했다.

유단자가 되고 대학 진학보다 군대를 먼저 간 것도 목소리 때문이었다.

특수부대에 차출된 건 내 화려한 단증 덕이었다.

 

생각보다 길게 7년간 군에 있었고 제대한 뒤에는 바로 땅을 사고 집을 짓기 시작했다.

 

그러던 어느날 세상이 망했다.

 

모든 전자장비가 한순간에 먹통이 됐다.

스마트폰은 물론 티브이나 인터넷, 자동차가 멈췄다.

전기는 당연히 정전됐고 수도와 가스가 그다음으로 멈췄다.

 

단순한 불편함이 아니다.

세상이 돌아가지 않을만한 큰일이었다.

댐이 터졌고 발전소가 폭발했다.

사람이 살지 못하게 된 지역도 넓어졌다.

 

쉘터에 있던 전자장비도 다 못쓰게 되어서 나 또한 고생 했지만, 워낙 대비가 잘 되어 있어서 극복할 수 있었다.

 

혼란의 시기에 사람들은 서로를 약탈하고 공격한 시기가 있었고 그다음은 크고 작은 무리로 나뉘어 생존을 도모했다.

 

안정화되는 줄 알았다.

 

어느날 괴물들이 튀어나왔다.

다른 세계에서 온 괴물이라거나 어디 연구소에서 만들던 생명 병기라고나 지구가 인류를 쓸어버리기 위해서 만들어낸 존재라는 이야기들을 했다.

하지만 아무도 진실을 알지 못했다.

 

괴물은 사람을 포함한 동물들을 모아서 뭉쳐 놓은 것 같이 생겼다.

팔다리가 뒤섞여 여기저기서 튀어나와 있었고 눈코입도 신체 곳곳에 박혀있었다.

괴물들끼리도 같은 모양이 하나도 없었다.

그냥 괴물이라는 말로밖에 표현이 안 되는 존재였다.

 

괴물의 공격에 사람들은 저항했지만, 손발을 잘라도 남아 있는 손발이 많았고 총칼에 신체가 훼손되면 도마뱀처럼 훼손된 부위를 잘라내며 공격했다.

 

생존한 인류를 절망에 빠트린 괴물들은 모든 인류를 차근차근 줄여 나갔다.

 

그러다가 세상이 망한 지 십 년, 그동안 잘 피해 다닌 나에게도 찾아왔다.

 

멸망에 대비하라던 머릿속 목소리는 무엇을 위해 나를 괴롭혔나 궁금했다.

이렇게 피하고 숨기만 하다가 죽을 거면 차라리 처음에 죽게 하지 힘만 들게.

 

폭약을 심어 놓은 저지선이 차례를 뚫리고 남아 있는 모든 탄약을 소비해도 괴물의 진입을 막을 수 없었다.

 

나이프를 들고 저항했지만, 괴물의 팔에 사지가 잡혔다.

 

늘 언젠가는 마지막이 있을 거로 생각해 왔지만 그게 오늘일 줄은 몰랐다.

 

그리고 이렇게 무력하게 죽을 줄은 몰랐다.

 

순간.

 

―기다렸다! 합류해라!―

 

머릿속에 목소리가 들렸다.

괴물의 수십 개의 눈 중 하나와 눈을 맞췄다.

 

내가 멸망을 준비해 온 게 이런 괴물이 되려고 한 건가?

나는 온몸으로 저항했지만 결국 괴물에게 흡수당했다.

 

우리는 수십억 년 동안 지구에서 살고 죽어간 모든 존재들의 기억과 DNA를 가진 존재다.

땅 위에서도 땅속에서도 물속에서도 살아갈 수 있고 방사능에 오염된 환경에서도 살 수 있다.

 

우리는 혹독한 자연환경에서 살아가며 지구가 원래대로 복원되기를 기다릴 것이다.

 

모든 오염과 파괴가 복원되는 날 우리는 조각조각 나뉘어져 세상에 다시 생명을 퍼트릴 것이다.

 

익숙하다.

이번이 7번째 멸망이니까.

 

오늘은 인류의 마지막이 아니라 새로운 시작이 되는 날이다.

댓글 1

어디가니님의 댓글

작성자 어디가니 (223.♡.169.240)
작성일 09.20 07:17
잘 읽었습니다. 지금 읽고 있는 류츠신의 삼체 게임이 생각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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