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줄 글쓰기] 오늘의 한 단어 - 휴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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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랜만에 휴식이다.
이렇게 편하게 등을 붙이고 싸구려 황주나마 먹는 게 얼마만 인지 모르겠다.
생각해 보니 어릴 때 몰래 아비의 술을 훔쳐 먹을 때 빼고는 처음인 것 같다.
아비는 동네에서 힘없는 사람이나 괴롭히던 왈패로 건달이 될 주제도 못 되는 사람이었다.
어미는 자칭 퇴기 출신이라고 하는데 글쎄?
그 인물을 보면 주방일이나 했을 법하다.
절강성 뒷골목에 그저 그런 하층민이었다.
동네 사람들 상대로 주먹질하고 사기 치고, 그러다 걸리면 죽기 직전까지 맞거나 머리채가 뜯겼다.
그런 뒷골목 인생의 자식인 나 역시 내 아비나 어미처럼 그런 인생이 될 거로 생각했다.
그런데 무림맹에서 무림 공적을 잡는다며 설쳐댔다.
그 싸움에 거리 하나가 사라졌다.
죽은 사람만 수천 명 아무도 책임지지 않았다.
무림맹이나 사파나, 마교나 다 쓰레기들이다.
졸지에 부모를 잃은 나와 친구들은 배운 게 도둑질이라 모여서 돈을 빼앗고 재물을 훔쳤다.
그런 우리를 토벌한다고 영웅건을 쓴 도련님이 칼을 휘둘렀다.
운이 좋은 건지 나쁜 건지 나만 살아남았다.
도련님은 부모 잃은 고아들을 죽여 놓고서는 영웅 대접을 받았다.
세상이 참 더러웠다.
세상은 더러운데 나는 힘이 없고 같이 도둑질할 동료들도 없어서 거지가 됐다.
조금 빠릿빠릿하게 움직였더니 왕초가 개방에 들어갈 생각이 없냐고 물었다.
개방이 뭔지 몰랐다.
들어 보니 구파일방 중에 일방이 개방이란다.
구파일방은 또 뭔데?
무림맹의 중추가 어쩌고 떠들길래 그냥 나와 버렸다.
더러워서 거지 짓도 못 해 먹겠다.
산속에나 들어가서 살아야겠다고 무턱대고 산에 들어왔는데 늑대를 만났다.
영락없이 죽겠다 싶었는데 번쩍 빛이 나더니 늑대들이 죽어 있었다.
반짝이는 대머리 누나가 검을 들고 서 있었다.
누나는 대머리가 아니라 비구니라서 일부러 깎은 거라고 했다.
자신이 검후란다.
천하를 돌아다니며 고수들하고 검을 겨루는 사람이란다.
나보고 짐꾼을 하지 않겠냐고 물었다.
내가 불쌍해 보였나?
그렇겠지.
고아 거지새끼를 보고 불쌍하게 보지 않으면 사람이 아니지.
뭐 그건 기분 나빴지만, 정파니 사파니 하는 사람들을 다 만나서 싸울 거라는 말에 검후 누나를 따라나섰다.
오 년을 따라다닌 나는 청해성에서 누나와 헤어졌다.
어디 잠깐 다녀온다고 객잔에서 기다리라고 하더니 영영 돌아오지 않았다.
아무리 절세의 고수라도 마교는 혼자 가는 거 아니라고 그렇게 이야기했는데 홀랑 가서 죽어버렸다.
검후 누나가 죽었다는 소식을 들은 나는 바로 잠적했다.
그래도 은인인데 원수는 갚아 줘야지.
누나한테도 말은 안 했고 나도 처음에는 몰랐지만 나는 천재였다.
누나가 다른 사람들과 싸우는 모습을 한번 보고 그대로 외워버렸다.
누나가 익혀두면 평생 감기는 안 걸릴 거라는 기본 토납법을 기반으로 심법도 만들어 버렸다.
그런 희대의 천재인 나도 내가 외운 무공들을 하나로 엮는 데는 실패했다.
시간이 더 있었다면 하나로 모을 수 있었겠지만, 육체의 힘이 가장 왕성할 때 복수를 시작해야겠다는 생각에 서른에 강호에 출도했다.
철검을 등에 메고 박도를 허리에 찼다.
무당, 화산, 남궁의 검의 묘리를 하나로 모으고 팽가와 녹림, 사흑련의 도의 묘리를 하나로 모았다.
일도일검혈로행.
내가 마교와 벌인 일인전쟁을 그렇게 부른단다.
멋지네.
자칭 천마라는 놈의 목을 자르고 나니 할 일이 없어졌다.
심장에서 피가 뽈뽈 나오고 있으니 할 일이 있더라도 더는 할 수 없다.
정파 놈들도 손을 봐주고 싶은데 다른 놈이 하겠지.
아니면 말고.
이렇게 편하게 등을 붙이고 싸구려 황주나마 먹는 게 얼마만 인지 모르겠다.
오랜만에 휴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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