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필 - 길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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ㅡ 야아~ 나 여기서 압구정동 찾아가라고 해도 못찾아가~ 길치인 내가 퀵서비스를 어떻게 하냐?
남대문 앞에서 두 청년이 대화를 나누고 있다.
고딩친구 동한이는 고딩때부터 VF 라는 하얀 오토바이를 타고 다녔는데
군 전역후에도 VS 라는 오토바이로 퀵서비스 맨을 하고 있었다.
"야! 걱정마. 서울지리? 보름이면 다 외워. 오토바이? 하루면 잘 타. 오토바이값? 한달이면 갚아"
친구의 꼬득임에 나는 퀵서비스맨을 하게 되었다.
근데 그의 말대로 235만원 하는 '데이스타' 오토바이값은 금방 벌었고, 서울지리를 청량리 북부... 빼고는 서울 전역을 다 돌아다님으로 길치는 해방되었다.
서류 배달일은 정말 많았다.
남대문에서 포스코사거리, 포스코사거리에서 전농동으로 전농동에서 다시 신촌으로... 신촌에서 다시 남대문으로...
사장은 특이하게 일본인이었다.
일본인들은 특히 '박사' 이런 호칭들을 많이 쓰나보던데 그가 한국에서 벌인 사업도 죄다 뒤에 '박사' 가 들어갔다.
"이사박사, 청소박사, 빨리박사..." 빨리박사가 바로 퀵서비스 회사였고 사무실은 남대문이었다.
친구는 조언을 했다.
퀵서비스 오토바이는 엔진오일이 생명이야. 엔진오일은 꼭 300키로~350키로에서 갈아.
엔진오일은 이틀에 한번씩 갈았다. 당시 엔진오일 한번 가는데 6천원이었는데
말하자면 이틀만에 서울을 350키로... 일주일이면 서울 - 부산을 왕복하는 거리를 배달일로 달렸다는 뜻이다.
서울에서 이십년 이상을 살았어도 내가 아는길 빼고는 길치였던 나는
'길치' 허울을 벗어버리게 되었다.
50이 넘은 지금도 어지간한 길은 네비없이도 잘 찾아다니고, 다만 강변로에서 차가 막히는지 안막히는지만 확인하는 용도로만 썼다.
25년 전이나 지금이나 서울길에서 가장 크게 바뀐건 "청계고가로", "삼일고가로", "아현고가로" 등등이 없어진 정도였다. (씨발 오세훈...)
길을 다 알게되니 퀵서비스일은 참 편했다. 비오는날은 물론, 눈오는날까지 죄다 출근했더니 일본인 사장도 날 무척 좋아했다.
그후로 50이 된 나는 회사원으로.. 동한이는 개인택시를 몰고있다. 끝.
벗님님의 댓글
아마 스마트폰이 우리나라에 이렇게 보급되지 않았다면 '길치' 딱지가 항상 붙어있었을 것 같습니다.
'거기로 가봐~ 거기가 더 빨라~' 하며 알려주는 이 친구 덕분에, 혹은 이 친구를 믿고
새로운 길로 발걸음을 해보는 게 일상이었습니다.
이 친구가 틀린 말은 하지는 않으니까.. 라고 믿으면서 말이죠. 아마, 계속 이래주겠지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