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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전에 쓴 무협소설 마지막 장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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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2025.04.22 09: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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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은 머무르지도, 쉬지도 않고 흘러갔다.

빠르지도, 느리지도 않게, 그저 일정하게 흘러갈 뿐이건만 사람들은 그것을 빠르다 하며 아쉬워한다.

봄이 가고, 여름도, 가을도 스쳐 지나갔다.

겨울. 엽성과 구양연이 천산에서 두 번째로 맞는. 그리고 구양연의 마지막 겨울이었다.

옆으로 비스듬히 누워 운기하는 구양연의 온몸이 땀으로 흠뻑 젖었다. 의식적으로 일정하게 유지하는 숨소리가 힘겨웠다. 숨을 들이마실 때마다 만삭의 배가 불룩 솟아올랐다.

앉은 자세에서 몸을 슬쩍 앞으로 숙여 그녀의 명문혈에 장심을 대고 진기를 도인(導引)하는 엽성 역시 땀에 젖은 것은 마찬가지였다. 그의 몸에서는 아예 아지랑이가 피어올랐다.

임신을 하고 복중의 태아가 자라면서 구양연의 진기 흐름에도 큰 변화가 나타났다. 몸속을 흐르던 진기가 태아에게로 빨려 들어가기 시작한 것이다.

음기를 말리고, 심맥을 불태울 듯 날뛰던 양기가 태아에게로 흡수된 것은 다행이었다. 미처 흡수되지 못한 기운은 궁전을 숙위하는 병사들처럼 자궁을 감싸고 지켰다. 양기가 안정되면서 며칠에 한 번씩 주기적으로 일어나던 발작이 사라졌다.

문제는 양기뿐만 아니라 음기까지, 아니 아예 생기(生氣)가 다 아이에게로 빨려 들어가고 있다는 점이었다. 구양연 이전에는 여인을 제대로 접해보지 못한 엽성으로서는 이해할 수 없는 기이한 현상이었다.

“나도 이런 경우는 처음 보네.”

임산부를 수없이 진맥해 본 하크만 의원도 고개를 젓기는 마찬가지였다.

“임신을 하면 여인의 몸은 아이에게 모든 것을 내어주지. 먹는 것만 해도 열을 먹으면 그중의 여덟, 아홉은 태아에게로 간단 말이지. 하지만 이 정도는 아니야. 한 번 아이를 낳을 때마다 생명의 근원이 되는 기운까지 모두 내준다면, 세상에 자식을 낳고자 하는 여인이 몇이나 되겠는가?”

엽성의 상식에도 부합하는 당연한 이야기였다.

“확언은 할 수 없지만 이렇게 특이한 경우라면…… 아무래도 산모의 체질 때문이 아니겠나. ……두 번의 임신을 기대할 수 없으니 아이 하나라도 튼튼하게 낳으려는 본능일지도. 아이의 맥은 아주 튼튼하다네.”

구양연은 사랑하는 사람과 아이를 갖는 것이 소원이라고 했었다. 그리고 그 대가는 더 빠른 죽음이었다.

“날 꼭 살려줘요. 아이를 내 손으로 안아볼 수 있을 때까지만.”

임신 육 개월이 지나가던 어느 날, 그녀는 엽성의 손을 꼭 잡으며 부탁했다. 희고 부드럽던 그 손은 이미 메말라 나무껍질처럼 갈라지고 있었다.

그녀의 명을 붙들어 놓기 위해 모두가 무진 애를 썼다.

하크만 의원은 사흘이 멀다고 아시나 마을을 찾아 진맥했다. 늙은 의원은 환자의 상태에 따라 약재의 종류와 배합을 조금씩 바꾸느라 머리를 싸맸다.

아시나 마을의 사냥꾼들은 며칠씩 멀리 사냥을 나갈 때는 엽성을 빼주었고, 사냥감을 잡으면 가장 부드럽고 소화하기 좋은 부위는 구양연의 몫으로 넘겨주었다. 아낙들은 번갈아 가며 엽성의 집에 찬거리를 갖다주었다.

그들의 배려 덕에 엽성은 구양연의 간호에 전념할 수 있었다. 부지런히 하크만 의원을 지게에 태워 모셔 왔고, 환약 외에 추가로 필요한 약재를 달여 탕약을 만들었다.

그 와중에도 엽성은 마을에서 자신의 몫을 다 하는 것을 잊지 않았다. 사내들이 멀리 사냥을 나가면 짬 나는 대로 물 긷고, 나무를 베어 이웃들을 도왔다. 마을 근처에 설치해 둔 덫을 수시로 점검하였으며, 활이며 창의 관리도 도맡았다.

그는 호의를 신의로 답할 줄 아는 사람이었다.

바쁜 일과 중에서 가장 중요하고 힘든 일이 바로 구양연의 운기를 돕는 일이었다. 약은 사흘에 한 번씩 먹었지만, 운기는 하루에 한 번씩 도와줘야 했다. 체내의 음기를 보호하고 키워주지 않으면 모조리 자궁으로 빨려 들어갈 판이었다.

운기를 돕는 엽성의 입장에서도 이전보다 훨씬 난이도가 올라갔다. 진기의 섬세한 운용을 위해 막대한 심력을 쏟아붓는 것은 물론이요, 필요한 공력 또한 막대하였다. 이것을 매일같이 반복하다 보니 삼십여 년 동안 수행하여 쌓은 진원지기(眞元之氣)까지 소모될 판이었다.

하지만 엽성은 아무 내색하지 않았다. 오늘만 해도 운기를 마치고 나니 단전에서부터 찌릿찌릿한 통증이 퍼져 나갔지만 태연한 표정을 유지했다.

그의 아내가 매일 겪는 고통과 불안에 비하면 이쯤은 아무것도 아니었다.

“고마워요.”

구양연이 힘겹게 입을 열었다. 몸에 기운이라고는 하나도 없어 보였다. 그나마 운기를 하고서 상태가 조금 좋아진 것이 그 정도였다. 최근 며칠은 집 안에서나 겨우 몇 발짝을 움직였을 뿐 대부분의 시간을 앉거나 누워서 보냈다.

“아이는 어떻소?”

“조금 전까지 발을 뻥뻥 차더니 지금은 자나 봐요.”

엽성의 두꺼운 손이 조심스럽게 불룩한 배 위에 올라갔다. 태동을 처음 느끼던 그 순간은 두 사람 모두에게 잊지 못할 기억이었다.

“발로 차는 힘이 이렇게 좋은 걸 보면 아들이겠죠?”

지난 몇 달 동안 구양연이 수도 없이 던진 질문이었다.

딸이라면. 이 저주받은 체질을 물려주게 된다면.

생각하고 싶지 않은 가정이었다. 그래서 그녀의 질문은 항상 배 속의 아이가 아들이라는 것을 확인받으려는 내용으로만 이루어졌다.

“마을의 할머니들도, 의원 어른도 모두 아들일 거라고들 하시지 않소.”

태아의 성별을 누가 확실하게 말할 수 있을까만은 노인들은 저마다의 이유를 들어 아들일 것이라고 말했다. 엽성 역시 구양연이 안심할 수 있는 대답을 해주며 한 마디를 덧붙였다.

“나는 당신을 닮은 예쁜 딸도 좋소.”

“꼭 상공을 닮은 아들을 낳을 거에요. 이제 며칠만 있으면 만나게 되겠죠.”

그녀의 말대로 닷새 뒤 진통이 시작됐다. 구양연은 어슴푸레한 새벽부터 끙끙 앓기 시작했다. 손과 발을 주물러주던 엽성은 동이 트기 무섭게 왕연덕의 집으로 달려갔다.

쿠틀룩과 왕연덕의 처는 마을에서 산파 역할을 하고 있었다. 마을의 아이들은 대부분 태어날 때 두 노파의 손을 거쳤다.

초로의 부인은 이른 아침부터 엽성이 올 줄 알았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내 그러잖아도 오늘, 내일이면 진통이 오겠거니 했소. 집에 가 계시오. 형님 모시고 함께 갈 터이니.”

옷을 갖춰 입으러 들어가던 왕연덕의 처가 멈칫하더니 엽성에게 한마디를 덧붙였다.

“마음 단단히 드시오.”

엽성이 집에 와보니 구양연의 진통은 더욱 심해져 있었다. 체력이 워낙 약해진 터라 고통이 더 크게 와닿는 듯했다.

잠시 후 쿠틀룩과 왕연덕의 처가 왔다. 어찌할 바를 모르고 발만 구르고 있던 엽성의 눈에는 두 부인이 대라신선이나 약사여래불처럼 보였다.

“얼굴 좀 보게. 고생이 많구먼.”

쿠틀룩의 처가 구양연의 얼굴을 자애롭게 쓸어주었다.

“엽 서방은 이제 그만 나가서 기다리시오. 다 끝나면 부를 테니. 시간이 오래 걸릴 수도 있소.”

“아닐세. 그럴 것 없네. 엽 서방도 함께 거들게.”

엽성을 밖으로 내보내려는 왕연덕의 처를 쿠틀룩의 처가 제지했다. 온화한 웃음을 머금고 엽성을 바라보는 그 눈빛은 가까운 미래를 예견하는 듯했다.

‘함께 할 시간이 이제 정말 끝일세. 조금이라도 더 곁에 있게.’

엽성은 마음으로 그런 이야기를 들은 듯했다.

두 부인은 바쁘게 움직였다.

쿠틀룩의 처는 임부가 아이를 낳기 편한 자세로 눕히고, 숨 쉬는 법을 알려주었다. 왕연덕의 처는 아이를 받을 때 필요한 준비물들을 갖추었고, 엽성은 그녀가 시키는 대로 옆에서 거들었다.

곧 본격적인 진통이 시작되었다. 그때부터는 도대체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 살펴볼 틈도 없었다. 엽성은 여지껏 어떤 싸움에서도 겪어보지 못한 당혹감과 괴로움을 느꼈다.

구양연의 신음이 점점 커지더니 비명으로 바뀌었다. 부인들은 구양연을 달래기도 하고, 힘을 줘라, 숨을 쉬어라 잔소리를 하기도 했다.

엽성은 구양연의 손을 꼭 잡고 미세하게 진기를 불어넣어 주었다. 해줄 수 있는 일은 그것밖에 없었다. 통증이 심해질 때마다 구양연의 손에 힘이 잔뜩 들어갔다.

몇 시진이나 지났을까. 해는 이미 중천에 떠 있었다.

“나온다, 나온다! 조금만 더! 힘을 줘!”

이미 기진맥진해서 반쯤 늘어져 있던 구양연이 다시 힘을 줬다. 어디에서 끌어왔는지 알 수 없는 힘이었다.

그렇게 또 한참 실랑이하고 나서야,

“으아앙!”

울음소리가 터져 나왔다.

“됐네, 됐어!”

목소리가 다 갈라진 쿠틀룩의 처가 아이를 받아 안았다. 산모만큼이나 힘이 빠진 왕연덕의 처가 얼른 아이를 담요로 감쌌다.

“애썼네. 사내아이야.”

구양연이 아이를 받아 안았다. 손끝이 덜덜 떨리는 것이 감격 때문만은 아닌 듯했다. 아이를 안을 힘이 전혀 없어 엽성이 옆에서 받쳐줘야 했다.

“아가…… 내 아기.”

겨우 개미 목소리만 한 소리를 쥐어짜냈다. 얼굴이 눈물로 범벅이 져서 쿠틀룩의 처가 천으로 얼굴을 닦아 주었다.

노파가 조용히 엽성의 어깨를 툭툭 쳤다. 엽성이 바라보자 쿠틀룩의 처는 조용히 고개를 가로저었다. 손가락으로 슬쩍 구양연의 아랫도리 쪽을 가리키는데, 아랫배부터 다리까지 덮어놓은 하얀 천의 일부가 붉게 물든 것이 보였다.

구양연이 잠시 아이를 안고 그 숨소리와 체온을 느낄 시간을 준 후 두 부인이 가만히 다가왔다.

“피가 말라붙기 전에 아이를 좀 씻기고 오겠네. 엽 서방과 둘이 시간을 좀 보내게나.”

구양연은 순순히 아이를 내주었다. 눈가에 그렁그렁한 눈물이 볼을 타고 흘러내렸다.

“고생 많았소. 정말 고생 많았소.”

엽성은 그녀의 손을 꼭 잡아 위로했다. 한편으로는 손을 통해 진기를 흘려보내며 그녀의 몸을 탐색했다.

예상대로 그녀의 몸은 이미 황폐할 데로 황폐한 상태였다. 음이고, 양이고 기운이란 기운은 모조리 다 빼앗겨 기경팔맥이 텅 비어 있었다. 진기를 지키고, 키워야 할 단전에서도 아무런 기운을 찾을 수 없었다.

본연의 기운이 무(無)에 가까웠으니 엽성이 아무리 진기를 쏟아부어도 소용이 없을 것이다.

이제는 정말로 이별을 준비해야 할 시간이었다.

“유모는 카미시 언니가 해주기로……. 사랑해줘요, 내 몫까지.”

구양연은 길게 유언을 남길 힘도 없었다. 짧은 몇 마디를 남기고는 천천히 눈을 감았다.

졸린 아이처럼, 감지 않으려고 애를 쓰다가 어쩔 수 없이 감았다. 감긴 두 눈 사이에서 마지막 눈물 한 방울이 또르르 흘러내렸다.

믿을 수 없이 허망했다. 영원하리라 믿었던 것은 아니지만. 이렇게 끝이라니.

멍하니 구양연의 얼굴을 만지작거리는 엽성에게 쿠틀룩의 처가 다가왔다. 따뜻한 물로 씻기고 이불로 다시 감싼 아이를 엽성에게 건네주었다. 돌아서서 나가는 노파의 눈에도 눈물이 고였다.

엽성은 품에 안은 아이를 들여다보았다. 우렁찬 울음소리를 토해낸 것이 언제냐는 듯 두 눈을 감고 새근새근 숨을 내쉬고 있었다.

엽성은 잠든 듯 눈을 감고 있는 구양연의 얼굴을 한 번, 다시 아이의 얼굴을 한 번 바라봤다. 오뚝한 코와 도톰한 입술이 특히 닮은 것 같았다.

끝이 아니구나.

언젠가 그녀가 했던 말이 떠올랐다.

‘하지만 새매의 날개도 없는데, 어찌 바람을 타고 날아갈 수 있겠어요? 그래도 이 아이는 저 새처럼 자유로운 삶을 살았으면 좋겠어요.’

엽성은 잠든 아이를 꼭 끌어안고 귓가에 조용히 속삭였다.

“네 이름은 능풍(能風), 엽능풍이다. 새처럼 마음껏 바람을 타며 살거라.”




여기까지입니다

읽어주시고 댓글 달아주신 분들께 모두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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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2

벗님님의 댓글

작성자 no_profile 벗님
작성일 04.22 11:15
걸음마를 시작하는 아이의 손을 잡아줄 수 있으면 좋았으련만..

애뜻한 글 잘 보고 갑니다. ^^

현이이이님의 댓글

작성자 현이이이
작성일 04.22 19:46
능풍은 뭔가 대단한 능력을 가진거 아닌가요?
무슨빵일까 부터 생각나는 저도 공감 못하는 T일지도요... 흑흑
잘 읽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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