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나일본부설의 바탕이 되었던 신공황후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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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no_profile 코미 180.♡.243.17
작성일 2024.07.17 21: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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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서기 권 제9 신공황후(神功皇后;진구우코구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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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름 4월 임인삭 갑진(3일)에 북쪽의 화전국(火前國;히노미치노쿠치노쿠니) 송포현(松浦縣;마츠라노아가타)에 이르러 옥도리(玉嶋里;다마시마노사토)의 

작은 냇가 옆에서 음식을 올렸다. 이때 황후가 바늘을 구부려 낚시바늘을 만들어 밥알을 미끼로 하고, 치마의 실을 풀어 낚싯줄을 만들어 물 가운데 돌 위로올라가 

낚시를 던지며 

“저는 서쪽에서 재물이 많은 나라를 얻고자 합니다. 만약 일이 이루어질 것이라면 물고기가 낚시바늘을 물게 하소서.”

라고 빌었다. 그리고는 낚싯대를 드니, 이에 비늘이 잔 고기(은어)가 잡혔다. 이때 황후가 

“보기 드문 것이다[希見은 메즈라시(梅豆邏志)라고 읽는다.].”

라고 하였다.

 그래서 사람들은 그곳을 매두나국(梅豆羅國;메즈라노쿠니)이라고 불렀다. 지금 송포(松浦;마츠우라)라고 하는 것은 발음이 잘못된 것이다. 이 때문에 그 나라 여

인들이 매년 4월 상순이 되면 물속에 낚시를 던져서 은어를 잡는 것이 지금도이어지고 있다. 다만 남자들은 비록 낚시질을 해도 고기를 잡을 수 없다.

이렇게 황후는 신의 가르침이 신험이 있음을 알게 되어 다시 하늘과 땅의 신에게 제사지내고몸소 서쪽을 치고자 하였다.이에 신전(神田)을 정해 이를

경작시켰다. 그때 나하(儺河;나노카하)의 물을 끌어다가 신전을 기름지게 하고자 도랑을 팠는데, 적경강(迹驚岡;토도로키노워카)에 이르러 커다란 바위가

막고 있어 더 이상 도랑을 팔 수 없었다. 황후가 무내숙녜를 불러 하늘과 땅의 신에게 칼과 거울을 바치고, 기도를 올려 도랑이 통할 수 있게 요청하도록 하였다. 

그러자 천둥과 번개가 쳐 그 바위를 깨뜨려 물을 통하게 하였다. 그래서 사람들이 그 도랑을 열전구(裂田溝;사쿠타노우나데)라 하였다. 황후는 강일포(橿日浦;카시히노우라)로 돌아가서 머리를 풀고 바닷가에서 

“나는 하늘과 땅의 신의 가르침을 받고 황조(皇祖)의 가호에 힘입어 창해를 건너가몸소 서쪽을 치고자 한다. 그래서 지금 머리를 바닷물로 씻는데, 만약 영험이 있다면 

머리카락이 저절로 양쪽으로 나뉘도록.”

이라고 말하였다. 

곧 바다에 들어가 씻자 머리카락이 저절로 나뉘어졌다. 황후는 나뉘어진 머리카락을 묶어 상투를 틀었다. 그리고 군신에게

 “무릇 군대를 일으키고 무리를 움직이는 것은 나라의 큰일이다. 안위와 성패는 반드시 여기에 있다. 지금 정벌하려고 한다. 이 일을 여러 신하들에게 맡겨 만약 일이 이루어지지 않으면 죄가 그대들에게 있게 된다. 이는 매우 가슴 아픈 것이다. 나는 부녀자이고 불초하지만 잠시 남자의 모습으로 웅대한 계략을 강하게 일으키고자 한다. 위로는 하늘과 땅의 신들의 가호에 힘입고, 아래로는 여러 신하들의 도움을 받아 군대를 일으켜 험한 파도를 건너 선박을 준비하여 재물이 많은 땅을 얻고자 한다. 만약 일이 이루어지면 여러 신하들이 함께 공이 있는 것이요, 일이 이루어지지 않으면 나에게만 죄가 있게 될 것이다. 나는 이렇게 생각하니 이를 함께 의논하자.”

라고 말하였다. 여러 신하들이 모두 

“황후는 천하를 위해 종묘사직을 안정시킬바를 꾀하고 계십니다. 또 죄가 신하에게 미치지 않도록 하시니 머리를 조아려 명령을 받들겠습니다.”

라고 말하였다.

가을 9월 경오삭 기묘(10일)에 여러 국(國)에 명령을 내려 선박을 모으고 군사를 훈련하도록 하였다. 이때 군졸들이 잘 모이지 않자 황후가 

“반드시 신의 마음 때문일 것이다.”

라고 말하였다. 곧 대삼륜사(大三輪社;오호미와노야시로)를 세우고 칼과 창을 바치자 군중(軍衆)들이 저절로 모였다. 이에 오옹(吾瓮;아헤)의 해인(海人) 

오마려(烏摩呂;워마로)에게서해로 나가서 나라가있는지 살펴보도록 하였다. 돌아와서 

“나라는 보이지 않았습니다.”

라고 답하였다. 또 기록(磯鹿;시카)의 바닷사람 명초(名草;나쿠사)48를 보내어 살펴보게 하였다. 며칠 뒤에 돌아와서 

“서북쪽에 산이 있는데 구름이 띠처럼 두르고 있었습니다. 무릇 나라가 있는 듯합니다.”

라고 보고하였다.

 이에 길일을 점쳐보니 출발하기까지 며칠이 남았다. 이때 황후가 친히 부월(斧鉞 : 왕의 위엄을 상징하는 도끼)을 잡고 3군50에게

 “징과 북소리가 절도가 없고 깃발이 뒤섞여 어지러우면 사졸들이 정돈되지 않는다. 재물을 탐하고 욕심이 많으며 사사로이 처첩(妻妾)의 일을 생각하면

반드시 적의 포로가 될 것이다. 적이 적더라도 가볍게 보아서는 안 되며, 적이 강하더라도 굴복해서는 안 된다. 폭력으로 부녀자를 범한 자는 용서하지 말고

스스로 항복해 오는 자는 죽이지 말라. 전쟁에 이기는 자는 반드시 상을 받을것이요, 도망하는 자는 당연히 죄가 될 것이다.”

라고 명령하였다. 얼마 후 신이 가르치기를 

“화혼(和魂 : 신의 가호)은 왕의 곁에서 목숨을 지킬 것이고, 황혼(荒魂 : 신의 징벌적 권능)은 선봉이 되어 군선을 인도할 것이다"

[和魂은 니키미타마(珥岐瀰多摩)라고 읽고, 荒魂은 아라미타마(阿邏瀰多摩)라고 읽는다.].

라고 하였다. 

신의 가르침을 얻고 나서배례하고, 의망오언남수견(依網吾彥男垂見;요사미노아비코오타루미)을 신에게 제사지내는 주재자로 삼았다. 

이때마침 황후는 산달이었는데, 황후가 돌을 들어 허리에 차고 

“일이 끝나고 돌아오는 날, 이 땅에서 태어나소서.”

라고 빌었다. 

그 돌은 지금도 이도현(伊覩縣;이토노아가타)의 길가에 있다. 이리하여 황혼을 군의 선봉으로 하고 화혼에게 청하여 왕선(王船)을 보호하도록 하였다.

9년 겨울 10월 기해삭 신축(3일)에 화이진(和珥津;와니노츠)에서 출발했다.이때 풍신(風神)이 바람을 일으키고, 해신(海神)은 파도를 치게 하였다

그리고 바닷속의 큰 고기들이 모두 떠올라 배를 떠받쳤다. 순풍이 불어 범선이 파도를 타니 노를 젓는 수고로움 없이도 곧신라에 이르렀다. 

그때 배를 따라온 파도가 멀리 나라 안에까지 미쳤다. 이 일로 인해서 천신지기(天神地祇)가모두 도와준 것을 알았다. 

신라왕은 전전긍긍하며 어찌할 바를 몰랐다. 여러사람을 불러 모아 

“신라의 건국 이래 바닷물이 나라 안까지 들어온 일은 아직없었다. 천운이 다해 나라가 바다가 되는 것이 아닌가?”

라고 말했다. 그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수군이 바다를 메우고, 깃발들이 햇빛에 빛나고, 북과 피리소리가 산천에 울렸다. 

이 광경을 멀리서 바라보던 신라왕은 뜻밖의 군사들이 나타나 장차 신라를 멸망시키려 하는 것이라 여기고 두려워 전의를 상실했다.

마침내 정신을 차리고 

“내가 들으니 동쪽에 신국(神國)이 있는데, 일본(日本)이라고 한다.(일본서기에는 '왜' 와 '일본'이 혼용되고 있다) 또한 성왕(聖王)이 있는데 천황(天皇)이라고 한다. 

반드시 그 나라의 신병(神兵)일 것이다. 어찌 군사를 내어 방어할 수 있겠는가.”

라고 말하고기를 들어 항복하였다. 흰 줄을 목에 드리우고 두 손을 뒤로 묶고, 도적(圖籍 : 나라의 지도와 호적)을 바치고 왕선 앞에서 항복하였다. 

그리고 머리를 조아리고

 “지금 이후부터 길이 천지와 함께 복종하여 사부(飼部;미마카이 : 말을 사육하는 사람. 즉 나는 당신의 비천한 마부가 되겠습니다라는 뜻)가 되겠습니다. 

배의 키가 마를 사이 없이, 춘추로 말빗과 말채찍을 바치겠습니다. 또한 바다를 사이에 두고 멀리 떨어져 있다는 것을 꺼리지 않고 해마다 남녀의 조(調)를

 바치겠습니다.”

라고 말하였다. 그리고 거듭 맹세하여 

“동쪽에서 떠오른 해가 서쪽에서 떠오르는 일이 없는 한, 또 아리나례하(阿利那禮河)가 역류하고 강의 돌이 하늘에 올라가 별이 되는 일이 없는 한, 

춘추로 조공을 거르거나 태만하여 말빗과 말채찍을 바치지 않는다면 천신지기여, 벌을 주십시오.”

라고 말하였다. 그때 어떤 사람이

“신라왕을 죽이십시오.”

라고 말하였다. 이에 황후가

 “처음에 신의 가르침에 따라 장차 금은의 나라를 얻으려고 하였다. 또 3군에 호령하여 '스스로 항복하여 오는 자는 죽이지 말라.’고 말한 바 있다. 

지금 이미 재국(財國)을 얻었다. 또한 사람들이 스스로 항복하였다. 죽이는 것은 상서롭지 못하다.”

라고 말하고, 결박을 풀어 사부(飼部;미마카히)의 일을 맡겼다. 드디어 그 나라 안에 들어가 중보(重寶)의 곳간을 봉인하고 도적문서(圖籍文書)를 거두었다. 

그리고 황후가 가지고 있던 창을 신라왕문에 세우고63, 후세에 표시로 삼았다. 그 창은 지금도 신라의 왕문 앞에 세워져 있다. 

신라왕 파사매금(波沙寐錦)은 즉시 미질기지파진간기(微叱己知波珍干岐)를 인질로 삼아 금은채색(金銀彩色) 및 능라겸견(綾羅縑絹)을 80척의 배에 실어 

관군을 따라가게 하였다. 이로써 신라왕은 항상 배 80척의 조공선을 일본국에 바치게 되었는데 이것이 그 연유이다.

 이에 고구려(高麗)와 백제 두 나라 왕은 신라가 도적(圖籍)을 거두어 일본국에 항복하였다는 것을 듣고 몰래 그 군세를 엿보게 하였다. 

그리고 도저히 이길 수 없다는 것을 알고는 스스로 영외로 나와서 머리를 조아리며 

“지금 이후부터는 길이 서번(西蕃 : 일본의 서쪽 변방이라고 스스로 낮추어 부르는 것)이라 일컫고 조공을 그치지 않겠습니다.”

라고 말하였다. 이로써 내관가(內官家)로 정하였다. 이것이 이른바 삼한(三韓)이다. 

황후가 신라에서 돌아왔다.



즉 3줄로 요약하자면....

1. 임신 중이던 신공황후가 서쪽 나라(신라)를 치려고 배를 돌로 틀어막고 

2. 무려 풍신과 해신을 부려먹으면서 신라로 오니까 신라가 쫄아서 스스로 항복하고

3. 고구려와 백제도 '와 신공황후 님 ㄷㄷㄷ' 하면서 스스로 와서 변방이라고 자처했다는 내용


출처는 동북아역사재단에서 번역한 일본서기 입니다.

왜 번역하냐 하면, 저런 걸 번역해 놓아야 나중에 일본의 헛소리나 주장을 제대로 알고 반박할 수 있거든요..

그리고 읽는 분들은 저게 말도 안 되는 건 아시겠지만, 구체적으로 왜 역사왜곡이냐 하면 그건 아래 글을 참조…

아래 신라가 일본 인질 보냈다는 썰에 대해. > 자유게시판 | 다모앙 | DAMOA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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