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0명의 병사가 1000명의 일본군을 무찌른 대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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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2024.08.01 14:33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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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9:17
댓글 12
/ 1 페이지
hailote님의 댓글의 댓글
@떡갈나무님에게 답글
처들어온게 왜구였다는게 1차.. 그리고 화포와 활로 무장한 조선의 수성은 강력하다는게 2번째 이유입니다만.. 사서에 따르면 실제 주력은 기병 4기라고...
벗바리님의 댓글의 댓글
@hailote님에게 답글
아마도 화포로 박살을 낸 다음, 기병 4기가 종횡무진으로 마무리를 지은 모양이군요. 엄청나네요 70:1000이라니
gar201님의 댓글
저게 정상인데 원뭐시기가 왜란 발발하자마자 판옥선 불태우고 튀지만 않았어도 왜변으로 끝날일을...
꼬질이님의 댓글
글을 읽다가 순간 김문순대인줄 알고 깜짝 놀랐습니다. ㅎㅎ
항상 역사를 알려주셔서 감사드립니다.
항상 역사를 알려주셔서 감사드립니다.
PINECASTLE님의 댓글
왜구 연구하시는 분들은 아는 걸로 아는데, 그게 아니면 제주도처럼 지방역사 중에 묻힌게 좀 많다고 들었습니다.
초식호랑이님의 댓글
좀 찾아봤더니 마지막에는 이렇게 되었군요. ㅎㅎㅎ
......이렇게 침입한 왜구를 토벌하고 대마도주에게는 무역 통제를 더욱 강화하면서 강경책을 썼다. 그러자 그 해 10월에 대마도주 소(宗義調)는 약탈하고 만행한 왜구의 목을 잘라와 사과하며 세견선의 증가를 간청해 왔다.
이에 조선에서는 대마도의 생활 필수품을 돕고자 식량 사정 등을 고려해 그들이 내왕무역을 할 수 있도록 세견선 5척을 허용하였다. 그러나 일본내의 혼란은 더욱 심해 왜구의 침입은 여전했으며, 도요토미가 통일할 때까지 계속되었다. 그와 동시에 왜구의 침탈은 대규모적인 임진왜란으로 이어져 조일 양국간의 통교는 파탄되었다.
......이렇게 침입한 왜구를 토벌하고 대마도주에게는 무역 통제를 더욱 강화하면서 강경책을 썼다. 그러자 그 해 10월에 대마도주 소(宗義調)는 약탈하고 만행한 왜구의 목을 잘라와 사과하며 세견선의 증가를 간청해 왔다.
이에 조선에서는 대마도의 생활 필수품을 돕고자 식량 사정 등을 고려해 그들이 내왕무역을 할 수 있도록 세견선 5척을 허용하였다. 그러나 일본내의 혼란은 더욱 심해 왜구의 침입은 여전했으며, 도요토미가 통일할 때까지 계속되었다. 그와 동시에 왜구의 침탈은 대규모적인 임진왜란으로 이어져 조일 양국간의 통교는 파탄되었다.
SDK님의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