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느님이 존재하는 이유 by St. Ansel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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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셀무스는 중세 유럽의 종교인이자 신학자로서, 최초로 인간의 이성을 이용해 하느님이 존재한다는 이유를 논리적으로 내세웠죠.
그의 주장은 다음과 같습니다.
안셀무스는 하느님을 "그것보다 더 위대한(우뤌하고 좋은 속성을 가진) 것을 생각할 수 없는 가장 위대한 어떤 것"이라고 정의했습니다. 그런데, 그것보다 더 위대한 것을 생각할 수 없는 어떤 것은 실제로 존재해야 한다고 했습니다.
왜냐하면 '그것보다 더 위대한 것을 상상할 수 없지만 존재하지 않는 것'보다 '그것보다 더 위대한 것을 상상할 수 없지만 존재하는 것'이 더 위대하기 때문이죠.
따라서 그것보다 더 위대한 것을 생각할 수 없는 어떤 것이 하느님이라면, 하느님은 그 본성상 반드시 '존재해야 한다.'고 주증했습니다. 이것이 안셀무스의 하느님 존재증명을 최대한 간단히 요약한 것입니다.
당연히 이에 대해 반박도 나왔습니다. 고닐로란 종교인은 “한번 머리로 생각할 수 있는 가장 근사한 섬을 생각해 보자. 땅은 은이고 산은 금이고 바위는 빵이고 먹을 수 있는 달콤한 나무에서 고기와 소시지가 열리고 호수엔 포도주가 솟아나며 병도 없고 늙지도 않고 슬픈 일도 없고 온도도 시원한 이런 섬을 상상해 보았다. 이 섬은 분명 말도 안 되지만 안셀무스의 논리에 따르면 그런 터무니없는 섬도 반드시 존재해야 한다는 이상한 결론이 나온다.“ 고 하였죠.
이에 대해 안셀무스는 "사유 안의 실재에서 실제적 실재성을 추론할 수 있는 경우는 '그것 이상으로 더 큰 것이 없는 존재(완전한 존재)'만이 유일하다"라고 하며 해당 비판이 부당함을 재반박했습니다.
쉽게 말해, 자신이 신에 대해 적용한 논리는 고닐로가 비유한 섬처럼 경험적이고 한정적인 현실세계가 아닌, 가지적이며 절대적인 이데아에만 적용될 수 있다는 말이죠.
이렇게 그의 논리는 허술해 보이면서도 논리구조가 훌륭한데다가, 그 논리구조 반박을 위해서는 철학적 사유와 인간 이성에 대한 이해가 필요해 꾸준히 600년 넘게 찬반 토론의 대상이 되었죠.
당장 이 떡밥을 물어 안셀무스를 지지한 철학자로 헤겔과 데키르트 및 라이프니츠 등이 있고 반박한 철학자로 데이비드 흄 및 칸트가 있죠.
코미님의 댓글의 댓글
1. 존재하는 모든 것은 하느님으로부터 존재를 받았다.
2. 하느님은 지극히 선한 분이시다.
3. 선에서 악이 나올 수 없다.
4. 따라서 악은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선의 결핍이다.
5. 선의 결핍이 일어나는 건 인간이 가진 원죄 때문이다.
6. 그러니 신앙과 선행으로 이를 매꾸어야 한다.
이렇게 설명하더군요.
vaccine님의 댓글의 댓글
원죄는 불량품 만든 신의 실패이라서 신이 잘못한거니 신은 완벽한 존재하는 논리의 모순입니다
신 이라는 기계가 하자 있는 제품 생산 공장이라는 거죠
코미님의 댓글의 댓글
그 죄로 인해 인간에게는 대대로 죄의 본능이 생겼고, 사람은 마귀가 통치하는 세상에서 죄로 인해 대대로 지옥 갈 존재가 되었습니다.
이를 무죄한 예수가 직접 인간의 몸을 입고 와 인류를 대신해 모든 죗값을 대속함으로, 예수가 하느님의 아들인 것과, 그가 자기 죄를 위해 죽은 것이 아닌 인류의 죄를 위해 대신 죽음을 믿는다면, 하느님에게는 그 사람에게 은혜를 베풀 수 있는 법적 권리가 생겨 그 사람은 하느님의 은혜로 구원을 받을 수 있다는 거죠.
이게 크리스트교에서 설명하는 논리에요.
vaccine님의 댓글의 댓글
뱀을 만든 실패
실패 투성이 멍청이가 무슨 완벽하고
정의롭고 자비로운 ^^?
이건 마약 풀어놓고 실수로 먹나 안먹나 보는 안동운 식 범죄조작단이잖아요
”하나님은 나한테 죽어“라는 헛소리 하는 정신병자에게 자비만 내리는 (땡)중이죠
코미님의 댓글의 댓글
이 질문조차 대응답안이 있습니다. 에덴동산의 진짜 주인이 누구인지 지속적으로 환시시키려는 의도였다는 겁니다. 당시 하느님은 아담과 하와는 선악과를 제외한 모든 열매를 허락했습니다. 하지만 그들이 호의가 계속되면 권리인 줄 알 것이기 때문에 에덴 동산의 진짜 주인은 하느님이며, 하느님은 그것을 아담과 하와에게 베푼 것이며, 아담과 하와가 그것에 감사하며 그것을 통해 창조주와 인간의 관계를 확인하는 표시이자 창조주와의 사랑을 다시금 느끼는 매개체로 삼으려 했다는 해석이죠.
뱀이란 존재는 인간이 자유의지를 가진 상황에서 겪을 수 있는 유혹과 충동을 의미하는데, 이것을 놔둔 것도 인간에게 자유의지를 주지 않으면 기계인형이나 다름없기에 창조할 의미가 없다고 설명하죠. 자유의지를 가지고 세상을 분석하고 탐구하며 하느님의 위대함을 느끼는 게 더 의미가 있다고 보는 거죠. 그 과정에서 엇나갈 수 있지만, 진정으로 진리를 안다면 결국 하느님을 믿는 것으로 결론이 귀결되고 마음을 다잡게 될 거고, 계속 엇나간다면 그건 선이 결핍되고 타락하여 스스로 지옥의 파멸로 가는 것으로, 교회가 다잡아야 할 대상이 되죠..
이런 식으로 은근히 저 크리스트교는 사람들의 질문들이 2천년 넘게 쌓이다보니 별별 질문에 대한 해답과 대응이 다 있더군요..
참고로 전 크리스트교를 믿으라고도, 불교도 믿으라고도 주장하지 않습니다. 단지 오늘은 기독교 철학이나 썰 풀어볼 겸 글 올린 것일 뿐입니다.
Rocksman님의 댓글
리처드 도킨스: 모든 생물은 유전자의 생존 기계와 다름 없다.
성경에서 얘기하는 유일신관은 과학이 발전함에 따라 그 힘을 잃어가고 있습니다. 사람의 뇌가 보이지 않는 것을 믿는 게 가능하기 때문에 종교가 유지되고 있을 뿐이라 봅니다.
코미님의 댓글의 댓글
까망꼬망1님의 댓글
하느님이라 부르더라도 기독교에서 말하는 하느님이라는 보장도 없다는건 간과하는군요.
코미님의 댓글의 댓글
그래서 칸트는 안셀무스의 주장은 존재와 속성의 개념을 분리하지 않은 것이므로 넌센스라는 거죠.
칸트가 이 핵심을 지적하기 전까지 사람들은 존재와 속성을 같이 여겨서 안셀무스의 주장을 근본적으로 비판하지 못해 매번 안셀무스와 그의 주장을 계승한 신학자들에게 반격을 당합니다.
그런데 이런 답을 내놓는데 걸린 시간이 600년이나 걸렸고, 그 답을 낸 칸트가 괜히 서양철학사에서 중요한 게 아닙니다.
vaccine님의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