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의 북한'이라고 불리는 동네, 히메시마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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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오이타현 북동쪽 바다에 위치한 아주 작은 섬, 히메시마무라(姫島村)는 ‘일본의 북한’이라는 별명을 갖고 있습니다. 인구는 2천 명도 안 되는 이 조용한 어촌 마을이 어떻게 이런 악명을 얻게 되었을까요? 그 배경과 역사, 그리고 현재의 모습을 소개하겠습니다.
히메시마무라가 '일본의 북한'이란 오명을 쓰게 된 계기는 1950년대 후반부터 시작됩니다. 히메시마에서는 두 인물이 마을의 촌장직을 두고 치열하게 경쟁했는데, 한 사람은 어민 출신의 정치 신예인 후지모토 겐키치(藤本元吉), 다른 한 사람은 기존의 마을 권력을 상징하던 시카노 가메타로(鹿野亀太郎)였습니다. 이 둘은 내가 당선되면 상대방은 씨를 말린다고 이를 갈며 전쟁을 방불케 하는 분쟁을 벌이다가 1961년 선거에서 후지모토 겐키치가 촌장으로 당선되게 됩니다. 이후 이 작은 섬에 새로운 권력 구조가 자리 잡기 시작하죠.
후지모토 가문은 시카노 가문과 그를 지지하는 주민들을 철저히 탄압해 권력을 공고히 하며 마을을 사실상 지배하게 되었어요. 특히 후지모토 겐키치의 아들인 후지모토 쿠마오(藤本熊男)가 뒤를 이어 촌장이 된 후에는, 마을 전체가 거의 한 가문의 손에 들어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게 됩니다. 후지모토 쿠마오가 마을의 주력 사업이던 염전업을 포기하고 보리새우 양식 산업 시작해 이를 독점하면서 주민들의 생계 자체를 장악했기 때문입니다.
보리새우는 히메시마의 자랑이자 핵심 산업이었어요. 그런데 문제는 이 산업이 후지모토 가문이 실질적으로 통제하는 협동조합과 업체를 통해 운영되었다는 점이에요. 마을 주민들은 생계를 위해 이 업체에서 일해야 했고, 누군가 정권에 반기를 들거나 비판을 하면 해고되거나 사회적으로 배제당하는 일이 흔했습니다. 말 그대로 주민들의 먹고사는 문제를 후지모토 쿠마오가 쥐고 흔들 수 있는 구조가 만들어졌던 거죠.
이런 독재가 어떻게 수십 년간 유지될 수 있었을까요? 몇 가지 이유가 있었습니다. 첫째는 지리적인 고립입니다. 섬이라는 특성상 외부의 감시나 개입이 쉽지 않았고, 주민들도 쉽게 섬을 떠날 수 없었어요. 거기에 후지모토 가문이 섬과 육지를 연결하는 유일한 배편마저 독점했죠. 둘째는 정치와 경제가 철저하게 얽혀 있었어요. 행정, 산업, 인사권까지 모두 촌장 중심으로 움직였는데다가 일본 자민당과도 유착되어 있었기 때문에, 후지모토 가문에게 연줄을 대지 않으면 마을에서 정상적으로 생활하기조차 어려웠죠.
또 하나 중요한 건, 반대파에 대한 무자비한 탄압이었어요. 선거에서 후지모토 일가에 반대했던 후보나 지지자들은 낙선 후 공공일자리에서 배제되고, 협동조합 이용을 막거나 마을 공동체로부터 소외당하는 경우도 많았다고 해요. 정보도 철저히 통제됐고, 외부 언론과 접촉하는 것도 사실상 금기였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마을은 점점 폐쇄적인 분위기로 굳어졌고, 마치 하나의 독립된 '체제'처럼 움직이게 된 거죠.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변화도 생기기 시작했어요. 2000년대 이후 일본 사회 전체가 투명성과 지방 분권을 강조하게 되면서, 히메시마도 울며 겨자 먹기 식으로 조금씩 외부와의 연결을 늘려나가기 시작해야만 했습니다. 특히 관광 산업을 개발하면서 외지인들이 섬을 찾기 시작했고, 일부 주민들도 조금씩 목소리를 내기 시작했어요. 물론 아직까지도 촌장 선거에서 후지모토 가문과 연관된 인물이 계속 당선되거나, 비판에 대한 거부감이 남아 있는 등 ‘옛 체제’의 잔재가 남아 있긴 해요.
히메시마무라는 일본 민주주의의 그림자를 가장 극명하게 보여주는 사례라고 할 수 있습니다. 권력 세습, 산업 독점, 정보 통제, 주민 감시 등 민주주의 사회에서 보기 힘든 요소들이 고스란히 작동했던 곳이거든요. ‘일본의 북한’이라는 별명이 과장으로 들릴 수는 있지만, 그 안에 담긴 권력 집중과 폐쇄성이라는 의미는 충분히 곱씹어볼 만하다고 생각합니다.
이 작은 섬을 들여다보면, 지방자치나 민주주의가 얼마나 쉽게 흔들릴 수 있는지를 새삼 실감하게 됩니다. 그리고 그 속에서도 조금씩 변화와 목소리를 만들어가는 사람들의 용기도 함께 떠올리게 되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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