빅머니 (61.♡.186.175)
2025년 11월 6일 PM 07:32 · 수정됨(11. 07. 09: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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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 사흘째가 되었습니다. 오늘은 어제처럼 7시부터 헐레벌떡 움직일 필요가 없어 우아하게 호텔 조식을 즐겼습니다. 물론 그래 봤자 1시간 더 여유 있을 뿐이긴 했습니다.
이 날은 크레타섬으로 가는 날입니다. 그래서 아테네 공항으로 가야 합니다. 11시 40분에 아테네 공항을 떠나 12시 30분 크레타 니코스 카잔차키스 공항에 도착하는 비행 일정입니다.
아침을 다 먹고 침대에 누워 잠깐 쉬었다가 8시에 체크아웃을 했습니다. 그리스어로 가볍게 감사 인사를 건넨 후 밖으로 나왔습니다.
여기서 잠깐! 간단 그리스어 회화 시간!
감사합니다 → 에프하리스토.
아침인사 → 칼림에라
오후인사 → 칼리스페라
잘 자요 → 칼리니흐타
안녕히 계세요 → 안티오
천만에요 → 파라칼로
죄송합니다 → 시그놈이
맛있었습니다 → 이탄 노스티모
네 → 네 (그냥 하나 먹고 들어가는 그리스어!)
아니오 → 오히
이 정도만 알아도 당신은 그리스인들을 국뽕에 휩싸이게 만드는 스마일 메이커가 될 수 있습니다.
공항까지는 지하철을 이용했습니다. 요금은 9유로입니다. 버스보다 거의 2배 가까이 되지만 흔들림이 적고 빨라 확실히 몸에 가해지는 부담이 적습니다.
아참, 아테네 교통권은 90분짜리, 1일패스, 3일패스, 공항철도표 모두 모양만 봐서는 다 똑같습니다. 그래서 별 생각 없이 일반 교통권으로 공항철도 타는 사람이 종종 있는 모양입니다. 하지만 걸리면 벌금입니다. 실제로 공항 내리는 개찰구쪽에서 역무원들이 공항철도표가 맞는지 단말기로 직접 검사하고 있었습니다. 반드시 공항철도표를 사세요. 걸리면 수십만원 벌금입니다.
아테네 공항은 지난 편에도 언급했듯이 국제선과 국내선 체크인 카운터들이 한 건물에 있습니다. 백 수십 개의 카운터가 있다 보니 제가 타야 할 에게안 항공 체크인 카운터 찾는 것도 일입니다. 처음에는 몰라서 좀 헤맸는데, 물어 물어 타다 보니 알게 되었습니다. 공항 곳곳에 보면 항공편 출발 시간 화면이 뜨는 곳이 있죠? 거기 보면 게이트만 뜨는 게 아니라 체크인 카운터 번호도 뜹니다. 그거 보고 찾아가면 됩니다.
에게안 항공은 100번대 쪽에 있어서 입구를 기준으로 왼쪽 끝으로 갔습니다. 이미 전날 모바일 체크인을 해둔 상태여서 바로 수화물을 보내고 보딩패스를 받았습니다. 그리고 보무도 당당하게 시큐리티를 거쳐 게이트로 갔습니다.
여기서 제가 표를 구입한 트립닷컴 도움이 컸습니다. 워낙 시끄러워 탑승 게이트가 바뀌는 소리를 방송만으로는 알아듣기 힘든데, 트립닷컴 앱은 게이트 변경시 바로 알려주더군요. 덕분에 쉽게 게이트 변경에 대응할 수 있었습니다. (트립닷컴은 자발적으로 홍보를 해준 저에게 무료 쿠폰이라도 줘야 합니다.)

시간이 어정쩡해서 점심은 공항 내의 에베레스트라는 프랜차이즈 식당에서 치킨파이로 해결했습니다. 한국에서 달달구리 파이만 먹다가 이런 짭쪼름한 미트파이류는 처음 먹어봤는데, 맛있더군요. 배도 꽤 든든했습니다. 같이 주문한 아메리카노가 5유로나 하는 바람에 4.5유로짜리 치킨파이는 정말 혜자스럽게 느껴졌습니다. 그러고 보니 그리스는 전반적으로 아메리카노가 굉장히 비싼 편입니다. 에스프레소는 2유로 받으면서 뜨거운 물 더 타준다고 3유로를 더 받아 먹는다니, 양심에 털이 나도 단단히 났습니다.
마침내 탑승 시간이 되어 탑승을 시작했습니다만, 기장이 20분 늦게 출발한다고 하네요. 이러면 일정이 꼬이는데 말이죠. 어쩌겠습니까, 인생은 불확실한 것이니까요.

에게안 항공… 1시간짜리 비행인데 놀랍게도 무슨 과일과 오트밀을 섞은 젤리 같은 간식을 줍니다. 3시간 30분짜리 스칸디나비아 항공도 안 주는 간식을 1시간짜리 국내선이? 스칸디나비아 항공에 대한 분노가 다시금 되새겨지는 순간이었습니다.

니코스 카잔차키스 공항은 작은 공항입니다. 내리는 것도 사다리차로 공항 활주로에 내립니다. 공항 건물까지 버스로 태워주기는 하는데 고작 100미터 거리입니다. 그냥 걸어가는 게 빠를 것 같기도 합니다.
공항 밖으로 나가면 이제 버스를 타고 시내로 가야 합니다. 시내라고 표현했지만, 마을 중심가라는 게 더 정확한 표현일 지도 모릅니다. 공항에서 시내로 가는 버스표는 1.2유로입니다. 마을 곳곳에 버스표 파는 자판기도 있고, 자판기가 없는 경우 정류장 근처 구멍가게에서 파니까 못 찾을 경우 주변 사람들에게 물어보시면 됩니다.

버스에 타면 기사가 회수권 같이 생긴 버스표를 반으로 찢어 나머지 반을 돌려줍니다. 여기는 뭐 탭하고 하는 방식이 아니에요. 진짜 예쁜 회수권입니다. 세대가 달라 회수권이 뭔지 모르는 젊은 분들은 검색해보세요. 공항이라고 해도 시내까지 고작 15분 거리입니다. 김포공항 느낌이라 바로 옆에 마을이 이어집니다. 비행기가 1시간에 평균 10대 정도 들락날락하던데 시내에서도 시끄러울 정도라 여기 사는 사람들은 상당한 스트레스를 받을 것 같습니다.
버스가 리버티 스퀘어에 도착했습니다. 여기서부터는 걸어가야 합니다. 호텔까지 주욱 이어지는 길은 대리석으로 포장이 잘 되어 있어 아테네보다 오히려 캐리어 끌고 가기 편합니다. 걷는 도중에도 맛집을 스캔하면서 6분 정도 걸어 호텔에 도착했고, 아직 체크인 시간 전이라 청소 중이니 좀 기다려 달라는 말에 호텔 입구에서 기다렸습니다. 10분쯤 지나 청소가 끝나고 체크인을 하며 도시세를 냈습니다. 아테네 때 미리 말씀 안 드렸는데, 그리스 정부가 관광객들에게 하루 5유로 도시세를 받아 처먹습니다. 어디까지 삥을 뜯는 건지.
아침 식사는 몇 시부터인지 물으니 7시 30분부터라네요. 제가 다음 날 8시에 제트페리로 산토리니를 가야 해서 조식을 못 먹을 것 같다고 하소연하자 저는 특별히 15분 일찍 먹게 해주겠답니다. 그리고 택시도 불러줄 테니 밥 먹고 7시 30분에 택시 타면 항구까지 금방이니 염려말라고 하네요. 감사를 표하고 방에 짐을 푼 뒤 정례행사로 베드버그 체크를 했습니다. 지금까지 25개 나라를 가봤고 여태껏 제가 지냈던 호텔 중에서 베드버그가 나온 적은 없습니다. 자유여행일 경우 미리 좋은 호텔을 고르고, 패키지는 좀 비싸더라도 4성급 호텔 이상 머무는 것으로 고른 까닭이긴 하겠죠. 그래도 늘 안심하기 위해 비오킬을 꼼꼼하게 뿌려쭸습니다. 여행용 비오킬 한 통이면 퀸사이즈 베드 기준 2개까지는 충분히 쓸 수 있습니다.
이제 여행을 시작해야죠. 오늘은 갈 곳이 좀 많습니다.
1. 성 미나스 대성당
2. 니코스 카잔차키스 무덤
3. 크노소스 궁전
4. 이라클리온 고고학 박물관
총 네 군데입니다.

가장 첫 번째 목적지인 성 미나스 대성당은 호텔에서 멀지 않아 걸어갔습니다. 그리스 정교회 성당이라 안팎에는 정교회 특유의 이콘이 있습니다. 이콘은 영어로 아이콘으로 성화를 뜻합니다. 동로마제국 시절 기독교 미술은 한때 우상 숭배 논란이 있었습니다. 이슬람 세력이 부상하면서 우상 숭배를 하지 않는 것이 이슬람의 확산에 도움이 되었다고 본 동로마 황제가 성화를 금지했던 것입니다. 이때만 해도 기독교는 신정일치라 황제가 최고 종교 지도자이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게르만족에게 기독교를 전파해야 하는 로마 주교, 훗날 교황은 이에 반발했습니다. 로마 주교는 이제 서로마는 우리가 알아서 잘 할 테니까 동로마 황제는 신경 끄라고 하면서 카톨릭과 정교회가 갈라지게 됩니다.

그렇다고 정교회가 미술을 완전히 포기했는가, 그것도 아닙니다. 신자들의 항의가 빗발치자 다시 허용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대신 엄격하게 정해진 양식대로만 성화를 그리게 허용했습니다. 그래서 화려하고 사실적인 카톨릭 성화와 달리 정교회의 이콘은 천년 전이나 지금이나 똑같습니다. 변화가 없는 정도가 아니라 그냥 똑같습니다. 그래서 정교회 성당 가셨을 때 성화들이 카톨릭보다 못하다고 보실 것은 아닙니다. 화가들이 실력이 없어서가 아니라 정교회는 원래 이렇게만 그리도록 되어 있을 뿐입니다.
훗날 16세기 무렵 종교개혁이 일어나며 다시 성상을 우상숭배라고 하며 개신교도들이 성당의 성상과 성화를 파괴하고 다녔는데, 저는 이런 것을 보며 이렇게 생각합니다.
“신실한 자들은 말없이 믿고 선을 행한다. 거짓된 자들이 자신의 믿음이 얼마나 큰지 떠들어대고 신앙을 빙자해 온갖 악행을 저지른다. 그들은 가만히 있으면 자신의 거짓을 참지 못하기 때문이다.”

성당 자체는 기본적으로 바실리카 양식에 돔이 추가된, 그러니까 이스탄불에 있는 하기아 소피아와 비슷한 비잔틴 양식입니다. 여기에 두 개의 종탑이 붙어 고딕 양식도 좀 섞여 있죠. 여기에 외양은 신고전주의까지 엿보여 꽤나 복합적입니다. 제가 건축사나 미술사 전문가도 아니니 [난생 처음 한 번 공부하는 미술이야기] 3권과 4권을 읽어 보시길 권유 드립니다. 이 책 시리즈는 제가 매우 즐겁게 읽었습니다. 한 번 읽고 나면 중근동과 유럽을 여행할 때 예술품을 보는 시각 자체가 깊고 풍부해지기 때문입니다.
이제 성당을 나와 남쪽으로 걸어갑니다. 두 번째 목적지인 니코스 카잔차키스의 무덤을 보러 갑니다. ‘그리스인 조르바’를 읽어보신 분이라면 다 아실 만한 그리스의 대문호입니다. 크레타섬을 사랑해서 이곳에 묻혔죠. 그리스인 조르바의 배경도 크레타섬입니다.

그의 무덤은 자유를 외친 영혼이 있기에는 좀 생뚱맞게 요새에 있습니다. 크레타섬 헤라클레온 구시가지는 성형 요새에 둘러싸여 있습니다. 과거 베네치아가 이 도시를 지배하고 있을 무렵 지은 요새입니다. 성형 요새라고 하지만 마을 하나를 통째로 감싸고 있고 해안까지 감싸고 있는 커다란 요새입니다. 이 요새는 여러 개의 뿔을 갖고 있으며, 카잔차키스의 무덤은 가장 남쪽 뿔 정상에 있습니다. 성당에서 여기까지 오는 길은 좀 언덕입니다. 버스를 타도 되지만 10분 거리라 그냥 걸었습니다. 경사로를 따라 보루 위에 올라가면 사방이 뻥 뚫려 가슴이 탁 트입니다. 구시가지 너머 바다까지 보일 정도로 시야가 시원하죠.

이런 곳에 그의 무덤이 있습니다. 비석에는 이렇게 쓰여 있습니다.
무엇도 원하지 않고
무엇도 두려워 않는
나는 자유의 몸이라
그의 영면을 빌고 발걸음을 크노소스 궁전으로 옮깁니다. 여기부터는 걸어서 갈 수 없습니다. 버스를 타야 합니다. 미리 구입해놓은 버스표로 버스를 탔습니다. 종점까지 가는 것이라 잘못 내릴까 걱정할 필요가 없습니다. 5km 정도 거리로 20분 정도 걸렸습니다. 시원한 버스 안에서 차창밖을 보며 가다 보면 금방입니다.
크노소스 궁전 입장료는 20유로입니다. 앞에서 가이드들이 대기 중이라 원하면 그들에게 비용을 지불하고 설명을 들을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저는 그만큼 영어 듣기 실력이 안 되는 관계로 가이드는 포기하고 자력갱생하기로 했습니다. 이러려고 미리 공부한 거니까요.

크노소스 궁전은 다이달로스의 미궁이라고 여겨졌습니다. 아테네 출신 발명가이자 건축가로 자신보다 뛰어난 조카를 질투해 살해하는 바람에 크레타로 유배당했습니다. 인성은 글러 먹었어도 워낙 재주가 탁월하다 보니 미노스 왕이 환대했고, 감격한 그는 왕을 위해 궁전을 건축했습니다.
하지만 포세이돈의 저주를 받아 소와 사랑에 빠져버린 왕비를 위해 가짜 소를 만들어 바치면서 다시 신세를 망쳤습니다. 이 흉측한(?) 이야기는 다 잘 아실 테니 넘어가고, 아무튼 그렇게 해서 태어난 미노타우로스는 포세이돈의 아들이었기 때문에 미노스 왕 입장에서는 죽일 수도 없었습니다. 그렇다고 식인 괴물인 미노타우로스를 놔둘 수도 없었기에 미노스 왕은 다이달로스에게 미궁을 건설하게 한 뒤 여기에 미노타우로스를 가뒀습니다.
물론 미노스 왕은 다이달로스를 그냥 두지 않았고, 그의 아들 이카로스와 함께 미궁에 가둬버립니다. 다이달로스는 미궁을 탈출하기 위해 깃털과 밀랍으로 날개를 만들어 탈출했지만 아들은 태양에 가까이 가다가 밀랍이 녹아 추락사했습니다.
탈출 사실을 알게 된 미노스 왕이 나중에 추격해 왔지만 다이달로스는 미노스 왕이 머무는 목욕탕에 끓는 물을 퍼부어 왕을 삶아 죽였고, 마침내 도피 생활을 끝내고 시칠리아에서 여생을 마쳤다고 합니다. 생각해 보면 미노스 왕도 제우스의 아들이라 데미갓인데 허무하게 죽었죠. 그래도 미노아 문명(또는 미노스 문명이라고도 씁니다)에 자신의 이름을 남기긴 했으니 어떤 면에서는 불멸이기도 하고요. 참고로 미노스 왕의 어머니는 에우로페로 유럽이라는 단어의 어원이 되었습니다.
아무튼 이 크노소스 궁전은 다이달로스가 미노스 왕을 위해 바쳤던 궁전 또는 미노타우로스를 가두기 위한 미궁 중 하나라고 여겨졌습니다. 물론 역사적으로 말하면 둘 다 아닙니다. 왕궁이 포함되어 있기는 한데 크노소스 궁전 전체 유적지는 복합 단지였습니다. 이 안에는 왕궁, 행정 시설, 종교 시설, 일반 주택이 혼합된 형태였습니다.

어째서 이런 식으로 지어졌을까 싶지만, 이보다 뒤에 지어진 미케네 유적도 그 전체가 왕궁 터가 아닌 것과 같습니다. 초기 청동기 시대의 도시들은 나중에 지어진 도시들에 비해 건물 간 구분이 좀 뚜렷하지 않은 면이 있습니다. 최초의 도시 중 하나인 차탈회위크를 보면 건물이 모두 붙여 있고 골목의 개념이 없었습니다. 문이 천장에 있다 보니 사람들은 지붕을 통해 이동했습니다. 이렇게 지은 것은 방어에 유리했기 때문입니다.

마찬가지로 크노소스 궁전도 방어에 유리하고 동선을 짧게 할 수 있게끔 건물들이 모두 하나로 합쳐진 형태가 되었습니다. 사실 우리가 지금 보는 크노소스 궁전은 전체 유적의 일부이고 아직 발굴이 안 된 부분이 더 많기 때문에 모두 발굴되면 다르게 보일 수도 있겠죠.
아무튼 이렇게 복잡하게 방들이 뒤섞였다 보니 미궁이라고 보기 좋습니다. 실제로 저도 다니다 보니 좀 헷갈려서 길을 잘못 들기도 하고 그랬습니다. 방의 수가 1,200개에 달했다고 하니 당시 사람들은 안 헷갈렸을까 싶습니다.
현재까지 발굴된 크노소스 궁전은 20세기 초에 영국의 고고학자 아서 에반스가 발굴한 것입니다. 문제는 그가 발굴’만’ 했어야 했는데, 멋대로 복원까지 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화가를 고용해 파편만 남아 있는 벽화를 상상해서 그려낸다던가, 시멘트를 이용해 건물을 복원하는 만행을 저질렀습니다. 그래서 아주 오랫동안 유네스코 세계유산에 등재가 안 되었다가 올해 들어서야 간신히 등재되었습니다.



지금 보는 벽화들은 말씀드린 것처럼 상상력을 동원한 면이 있어서 진짜인지는 알 수 없습니다. 이따가 박물관에 해당 벽화 원본 파편들이 있는데, 그걸 보시면 얼마나 상상력을 동원했는지 아시게 됩니다.
일단 그림들이 사실이라는 전제 하에 본다면 아테네 고고학 박물관 편에서 말씀드린 것처럼 꽤나 이집트 풍이 뚜렷하게 느껴집니다. 이집트의 인물화가 지금 보면 괴상하게 보이지만 그 사람들의 눈에 문제가 있었던 건 아니고 중요한 인물을 그릴 때 표현 양식이 정해져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집트의 인물화는 3가지 규칙이 있습니다.
1. 정면성의 원리
2. 그리드 기법
3. 중요도에 따른 인물의 크기 비례
먼저 정면성의 원리는 얼굴은 옆모습, 눈은 정면, 상체도 정면, 하체는 걸어가고 있는 측면을 그리는 것입니다. 3차원 존재를 2차원에 녹여내기 위해 일종의 입체파 형식을 취한 것입니다. 고대 이집트인들은 그림 속 인물이 영원히 살기를 바랐고, 그래서 그림 속에 완벽하게 그 사람의 특징을 모두 녹여내려고 하다 보니 그런 특이한 원리를 반영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중요하지 않은 사람은 이 정면성의 원리를 따르지 않고 현대인과 똑같이 보이는 그대로 그렸습니다.
그리드 기법은 그림을 그릴 공간을 18~21개의 그리드로 나눈 뒤 이 그리드에 맞춰서 사람을 그리는 것입니다. 그림의 크기는 그리드의 크기에 따라 변하지만 신체 비율은 절대 불변이었습니다.
그리고 중요한 사람은 크게, 중요하지 않은 사람은 작게 그렸습니다. 그래서 파라오는 엄청나게 크게 그리고 일반인, 특히 적들은 아주 작게 그렸습니다.
이런 흐름에서 제가 찍은 고대 이집트 벽화와 크노소스 궁전의 벽화를 비교해봅시다.


첫 번째 사진은 왕가의 계곡에서 람세스 9세의 무덤에 들어갔을 때 찍은 사진입니다. 정면성의 원리를 철저하게 보여주고 있는 사례입니다. 그리고 밑의 크노소스 궁전의 벽화를 보면 이집트보다는 더 자연스러운 자세를 취하고 있지만 정면성의 원리가 여전히 남아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미노스 문명이 이집트 문명의 영향권에 있었다는 것을 여실히 보여주는 사례는 이따가 박물관을 다룰 때도 보여드리겠습니다.
미노스 문명은 소를 신성시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미노타우로스 전설도 그 시작을 보면 소 이야기로 시작합니다. 미노스 왕이 포세이돈에게 제사를 바치기 위해 아름다운 소를 청했는데, 포세이돈이 보내준 하얀 소를 본 왕비가 소가 너무 아름다워 제사로 바치기에는 아깝다는 생각을 합니다. 그래서 왕에게 다른 소를 바치자고 얘기했고 이를 알게 된 포세이돈이 화가 나 왕비에게 저주를 내렸습니다.
동물과 인간이 뒤섞인 존재는 고대 이집트와 메소포타미아에서는 매우 흔한 케이스로 신을 상징합니다. 아직 원시신앙에서 벗어나지 못했던 시절이라 당시 사람들은 강력한 자연의 힘을 드러내기 위해 동물의 머리를 한 인간 형태의 신을 상상했습니다. 미노타우로스도 그런 케이스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래서 미노스 문명이 메소포타미아와 이집트 문명의 영향을 받아 소의 머리를 한 신을 숭배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실제로 미노타우로스가 중근동의 고대신 몰렉을 차용한 것이라는 해석이 있습니다. 몰렉은 소의 머리를 한 중근동의 신으로 미노타우로스와 거의 똑같이 생겼습니다. 바알이라는 해석도 있는데, 기독교에서는 바알제붑이라고 하여 파리대왕이 되었지만 고대 중근동에서는 폭풍의 신이었습니다. 제우스의 원조격인 신입니다. 고대에 폭풍의 신은 농사를 좌우하는 신이었기 때문에 최고신에 해당했고, 상징물로 황소를 썼습니다. 구약의 출애굽기 보면 유태인들이 금송아지 만든 거 보고 모세가 빡쳐서 첫 번째 받은 십계명을 바닥에 팽개치는 모습이 있죠? 그 금송아지에 대한 이름이 딱 나오지는 않지만 바알일 가능성이 높습니다.


게다가 크노소스 궁전에는 소를 상징하는 것들이 꽤 있습니다. 소를 뛰어넘는 소년들을 그린 벽화라든가, 소머리 장식, 그리고 소뿔을 단순화한 조각이 즐비했습니다. 건물 지붕은 이 소뿔 디자인으로 된 장식이 줄지어 나열되어 있었다고 추정합니다.

에반스가 제멋대로기는 해도 많이 복원했다고 하지만 여전히 이 도시는 너무 오랜 세월이 흘렀기에 남아 있는 잔해만으로는 도시의 전체적인 모습을 상상하기 어렵습니다. 다행히 박물관에 가면 나름의 복원 입체도가 있습니다.
느긋하게 감상했는데도 2시간이 채 안 걸리네요. 체력이 훅훅 떨어지는 소리가 들리니 이제 박물관으로 가야 할 시간입니다. 일단 갈증을 해결하기 위해 콜라를 하나 샀는데… 아아 500밀리 한 병에 3.5유로는 이 무슨 날강도 같은 가격일까요? 갑자기 LG생건이 매우 착하게 보입니다! 그동안 욕해서 미안했다는 생각마저 들 정도입니다.
여기서 또 한 번 제 실수가 있었습니다. 분명히 크노소스 궁전 앞에는 버스표 파는 곳이 없다는 얘기를 미리 봤습니다. 그럼 출발할 때 표를 2장 샀어야겠죠? 그런데 안 샀습니다. 물론 버스에서도 카드 결제로 바로 표를 살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버스에서 표를 구입하면 2배나 더 비쌉니다. 무려 2.5유로를 내야 합니다. 젠장! 젠장!
궁시렁대면서 30분쯤 달려 박물관에 왔습니다. 박물관은 제가 처음 헤라클레온 구시가지 중심가에 내렸던 바로 그곳에 있습니다. 찾기도 굉장히 쉽죠. 입장료는 12유로입니다.
안에 들어가면 1층은 유물들 위주고, 2층은 벽화가 주류를 이룹니다. 1층부터 천천히 돌아봅니다. 많은 유물이 아주 새롭지는 않습니다. 이미 아테네 박물관에서 봤던 것들과 겹칩니다. 좀 겹치지 않은 유물들 위주로 가봅니다.

먼저 인물상입니다. 보시다시피 매우 단조롭죠. 경직된 자세는 메소포타미아와 이집트와 유사합니다. 그러나 기술적으로 동시대 이집트 조각과 비교하면 기술력이 훨씬 떨어집니다.

하지만 도기류는 꽤 발달했습니다. 손잡이가 달린 컵이 있고 화려하게 채색되 흑적색의 도기들이 많이 보입니다. 크기도 무척 다양합니다. 작은 것은 간장종지 만한 것부터 해서 사람 두어명은 족히 들어갈 만한 것들도 있습니다. 그런데 사람이 정말 들어가 있는 도기도 있습니다. 당시 이들은 시신을 커다란 도기에 넣어 매장하는 풍습도 있었습니다.

소와 관련된 도기도 참 많죠.


이 조각상들은 설명 없이 보면 이집트 유물이라고 오해해도 좋을 만큼 완벽히 이집트풍입니다.



2층으로 올라가 벽화들을 보겠습니다. 아까 말씀드린 것처럼 벽화 자체는 대부분 파괴되어 파편만 남아 있는 상태입니다. 그래서 상상력을 동원해야 했죠. 그나마 남아 있는 부분들을 총동원해 그려냈지만 진짜 조금만 남아서 전체 그림이 이거 맞을까 의심이 드는 그림이 여럿 있습니다.


그냥 그림만 있는 것은 아니고 양각화도 몇 점 있습니다. 3500년 전에 이 정도 예술성을 갖췄다니. 놀랍죠? 사실 이집트를 먼저 다녀온 제 입장에서는 여러모로 동시대 이집트 유물들보다 현저히 떨어지다 보니 조금 감흥이 떨어지는 것도 사실이긴 합니다. 그래도 이 정도 수준의 문명은 당시 메소포타미아와 이집트 빼고는 형성된 곳이 없었으니 대단한 거죠. 이 시기에 아시아에서는 이제 겨우 상나라가 형성되었을 때입니다. 그 앞에 하나가 있다고 주장하기는 하는데 하나라는 아직 역사적으로 검증되지 않았습니다. 하나라일 가능성이 있는 이리두(얼리터우) 문화는 청동기를 쓰기는 했지만 문명이라고 할 정도는 되지 못했습니다. 이에 반해 중근동의 변방인 미노스 문명은 선형문자 A와 같이 자체적인 문자 체계도 갖췄습니다.
돌이켜보면 세계 4대 문명이라는 말도 중국인이 만든 말로 황화 문명이 메소포타미아, 이집트, 인더스에 시기상 최소 천 년 늦게 시작했기에 같은 레벨이 아닌데도 중국의 자긍심을 높이려고 만든 말에 불과합니다. 참고로 문명은 도시 및 국가 형성, 문자 체계 보유, 사회적 계층 구조 등 몇 가지 조건이 있어야 문명으로 간주하고, 그 중 하나라도 부족하면 문화로 칩니다.
해가 뉘엿뉘엿 지기 시작하네요. 이제 느긋하게 걸어서 호텔 방향으로 향합니다. 가는 길에 저녁도 먹어야 하고, 낮에 못 봤던 명소들을 들러야 하기 때문입니다.

이곳은 사도 바울의 제자 티투스(디도)의 유골 항아리가 있는 성당으로 이름도 성 티투스 대성당입니다. 잠깐 안에 들어가봤는데 조명을 거의 켜지 않아 어둡다 보니 보이는 게 별로 없네요. 그나마 제단 근처에 작은 조명이 켜져 있어서 사진 한 장을 더 찍어보았습니다.

잠깐 예배당 뒤쪽 의자에 앉아 휴식도 취하고 성당 내부도 감상하는데 저녁 시간에도 정교회 신자들이 한 명씩 성당 안에 들어와 예식을 취하고 나갔습니다. 제가 정교회의 의례에 대해서는 잘 알지 못하기 때문에 그냥 본대로만 말씀드리면, 입구에서 우선 성호를 긋고 들어와 성당에 놓여 있는 여러 이콘에 가볍게 입을 맞춥니다. 그리고 이콘 앞에서 간단한 기도를 올립니다. 이콘이 하나가 아니다 보니 이콘을 돌면서 이 의식을 이어갑니다. 여성들은 반드시 머리 수건으로 머리를 가리고 긴 치마를 입습니다. 그렇게 성당을 한 바퀴 돌고는 사람에 따라 의자에 앉아 묵상 기도를 하기도 하지만 보통은 다시 나가면서 성호를 그은 뒤 돌아갔습니다.
저는 기독교 신자는 아닙니다만 그들의 경건한 의례를 보고 있자니 존경심이 들었습니다. 삶에서 남에게 보여주기 위함이 아닌, 내 신앙을 위해 종교를 생활 속에 녹여내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성당을 나와 조금 걸으면 서서히 번화가가 보입니다. 이 번화가에는 오래 전 베네치아의 지배를 받던 시절의 중요한 건물 하나가 있습니다.

바로 베네치아 로지아로 17세기 지어진 건물입니다. 지금은 시청 건물인데 원래는 베네치아 귀족들이 모이는 곳이었습니다. 건물 양식을 보면 베네치아 두칼레 궁전과 어느 정도 유사성을 느낄 수 있습니다.

조금 더 걸으면 분수대가 있는데 세 마리 사자상으로 이뤄진 분수대입니다. 17세기 지어진 분수로 건설자의 이름을 따 모로시니 분수라고 합니다. 당연히 당초 목적은 식수 공급이었습니다. 가끔 모르시는 분들이 있어 유럽에서 분수의 역할에 대해 말씀드리자면, 원래 분수는 조경용이 아니라 식수 공급대입니다. 로마 시절 저 멀리 있는 상수원에서 수도관을 통해 끌어온 물을 도시 곳곳에 있는 분수대를 통해 일반 시민들에게 식수로 공급했습니다. 이 문화는 후대에도 이어졌고 유럽에서 분수는 시민들이 물을 길어가거나 빨래를 하는 곳이었습니다. 그렇게 낭만적인 곳은 아니었던 것이죠.
자, 오늘 볼 것도 다 보았으니 맛있는 저녁을 먹어야겠죠? 기왕이면 해산물을 좀 먹었으면 했습니다. 그래서 식당을 돌며 적당히 분위기 있고 조용하고, 특히! 담배 피는 인간 없는 식당을 찾았습니다. 마침 적당한 식당을 발견해 자리에 앉은 뒤 메뉴판을 요청했는데, 아뿔싸!
하필 이날 해산물은 재고가 없어 하나도 안 된다고 합니다. 그래서 차지키와 양 수블라키를 주문했습니다. 양고기 참 맛있었습니다. 빵 뜯어서 찍어먹는 차지키도 고소하고 좋았고요. 이게 해산물이었으면 더 좋았을 텐데…


식당 분위기는 좋죠? 맥주까지 한 병 깔끔하게 비운 뒤 호텔로 돌아오니 8시경입니다.
뭐 거의 이 시간에 돌아오는 게 일상이네요. 씻고 자면 딱입니다. 다음날 아침 8시 페리를 타고 산토리니로 건너가야 하기 때문에 일찍 잠들기로 했습니다.
다음 편에 이어집니다.
댓글 (12)
- 달
달려라쑈바
25.11.06 · 106.♡.200.247
시그놈이 하실상황은 있으셨나영? -
빅빅머니
→ 달려라쑈바 작성자
25.11.06 · 61.♡.186.175
한 번 있기는 했지만, 사실 까먹어서 못 써먹었습니다. -
노노말피플
25.11.06 · 122.♡.140.216
그리스 좋은 곳입니다.
음식도 좋고 사람들도 좋아요.
업무 때문에 15년 동안 1년에 2회 정도씩 다니고 있습니다. -
빅빅머니
→ 노말피플 작성자
25.11.06 · 61.♡.186.175
직항도 없는데 연 2회면 많이 피곤하시겠군요. -
채채게바라
25.11.06 · 36.♡.184.203
이런 정성스런 글 감사합니다.
스크랩 해뒀다 담에 또 읽겠습니다. -
빅빅머니
→ 채게바라 작성자
25.11.06 · 61.♡.186.175
감사합니다~ -
플플랫화이트
25.11.06 · 128.♡.229.211
잘 보았습니다. 감사합니다. -
빅빅머니
→ 플랫화이트 작성자
25.11.06 · 61.♡.186.175
산토리니편은 아마 주말에 쓸 듯합니다. -
쭌쭌찬이네
25.11.06 · 112.♡.48.53
정성스런글 감사합니다. -
빅빅머니
→ 쭌찬이네 작성자
25.11.06 · 211.♡.194.21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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