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포일러 포함입니다.
어제 <호프>를 봤는데 저에게는 매우 불호였습니다.
관객으로 하여금 긴장을 느끼면서 영화에 빠져들게 하는 방법들은 어느 정도 알려져 있습니다. <호프>는 그런 방법들을 매우 적극적으로 활용합니다. 예를 들어 처음에는 외계인의 흔적만 보여 주고, 그 다음에는 신체의 일부를, 나중에는 전부를 보여주는 것도 그렇습니다. 흔적도 철저하게 소-중-대의 순서를 따르고 있고, 외계인의 수도 한 개체에서 세 개체로 늘어납니다.
물론 이게 불만스러운 건 아닙니다. 불만의 요지는, 관객이 어떤 경우에 자극을 받는지를 감독이 잘 알고 있고, 감독이 영화가 그 지점만을 집요하게 자극한다는 점이었습니다. 가령 <호프>에는 등장인물 간에 의사소통이 잘 이루어지지 않는 장면이 너무 많습니다. A가 B에게 소리치고, B가 알아듣지 못하고, A가 다시 한번 (욕설을 섞어서) 소리치는 패턴이 너무 자주 나옵니다. 드문드문 썼다면 괜찮았을 텐데, 시종일관 이 패턴을 쓰니까 피로할 뿐만 아니라, 나중에는 '감독은 관객을 뭐라고 생각하는 거지?'라는 의문까지 들었습니다.
사실 이 의문이 진짜 불만의 요지입니다. <호프>는 단지 알려진 패턴으로 관객을 자극할 뿐만 아니라, 그렇게 자극을 받는 관객의 모습을 영화 자체에 투영합니다. 예를 들어 성기(조인성)가 무쌍을 찍는 마지막 장면을 살펴볼게요. 여기서 누군가가 성기를 보면서 "쟤는 왜 말을 잘 타냐?" "쟤는 왜 총을 잘 쏘냐?"라는 대사를 칩니다. 이건 전형적으로 관객이 영화의 개연성 부족을 꼬집을 때 하는 말입니다. 그러면 이 대사를 영화 속에 집어넣은 의도는 무엇일까요? 저는 둘 중 하나라고 봅니다. 영화가 자기 자신을 소재로 코미디를 하고 있거나, 아니면 관객을 희롱하고 있거나. (물론 둘 다일 수도 있습니다.) 전자는 웃고 넘어갈 수 있지만 후자는 좀 기분이 나쁩니다. 성기가 외계인을 물리치자 (실제로는 죽지 않았지만 아무튼) 차 안에서는 환호성이 터집니다. 심지어 성애(정호연)는 뜬금없이 "오빠, 멋있어!" 비슷한 대사도 날립니다. 저에게 이 장면은, 감독이 "관객은 잘생긴 남자 배우가 활약하는 걸 좋아해, 개연성 따위는 필요 없어."라고 말하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한가지 강조하고 싶은 건, 저는 <호프>의 개연성 부족을 탓하려는 게 아니라는 것입니다. 재미만 있다면 개연성은 좀 부족해도 상관없습니다. 하지만 영화가 나서서 "관객에게는 개연성 따위는 필요 없어."라는 태도를 노골적으로 드러내는 건 다른 문제입니다.
방금 언급한 장면을 마무리하는 방식도 좀 그렇습니다. 등장인물들로부터 환호를 받던 성기는 급작스럽게 차에서 떨어져 나갑니다. 그러니까 순식간에 성기는 화면에서 사라지고 남은 사람들은 당혹스러움에 빠집니다. 저에게는 이것도 감독의 권위를 과시하는 장면으로 보였습니다. 다시 말해 자신이 얼마나 손쉽게 관객을 당혹스럽게 만들 수 있는지를 과시하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이런 장면들이 더 있지만 글이 너무 길어져서 마쳐야 할 것 같습니다. 몇개만 더 언급해 보면, 쿠키에서 성기가 살아 있는 모습을 보여 주었을 때는 "조인성 정도의 배우가 연기한 캐릭터라면 아무리 개연성 없이 살아나도 관객은 납득할 거야."라는 태도가 느껴졌습니다. 그리고 성애가 학교에서 해술(임현식)의 경험담을 듣는 장면은, 아무리 생각해도 영화의 은유입니다. 그러니까 해술은 영화이고 성애는 관객이며, 해술은 스펙터클(산에서 굴러떨어져 외계인이 곰과 싸우는 모습을 봄)과 슬랩스틱(똥이 마려워서 손가락으로 항문을 막음)을 적당한 비율로 섞고 있는데, 성애는 그 이야기에 빠져들고 있습니다.
댓글 (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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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할러
09:03 · 221.♡.133.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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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수레실
09:08 · 116.♡.14.205
개연성이 부족한 건 인정하겠으나, 감독이 관객을 조롱할 의도를 갖고 있다..까지 가는 건 좀 너무 간 것 아닌가 생각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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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whocares
→ 수레실 작성자
09:19 · 58.♡.171.77
의견 주셔서 감사합니다. 글에서 좀 오버한 측면도 있는 것 같네요.
나홍진 인터뷰를 보면, 일단 관객이 인간 편을 들었다가 나중에는 죄책감을 느끼도록 연출했다고 하더라구요. 저는 여전히 감독이 관객을 컨트롤하려는 의도가 과하다고 생각되네요. (모든 감독이 그렇게 하지만 정도의 문제로 여겨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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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ASTERISK
09:12 · 118.♡.31.204
영화를 만드는 방법도 여러가지지만 즐기는 방법도 여러가지인데.. 어떤 영화는 왜?라는 질문에 대한 해답을 감독이 영화적인 기법으로 풀어나가며 카타르시스를 주는 방법도 있지만 호프 같은 영화는 이런일이 벌어지고 있다는 그 현상만을 극적으로 보여주고 관객은 영문도 모른채 이걸 지켜보며 어느순간 왜? 라는 질문은 잊고 그 상황에 몰입하게 되는거죠. 나홍진도 이걸 의식해서 관객들이 갖을만한 왜? 를 대사로 지금 그게 중요하냐 라고 일축시킵니다. 극장을 나서고 나서야 왜? 가 떠오르게 되어야 하는데 문제는 관객이 보면서 왜? 라는 생각이 자꾸 들면 이 영화는 망작이 되는거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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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사리사욕충족
09:12 · 58.♡.88.112
저는 불편해서 몸이 뒤틀리더라구요. 이게 도대체 뭐야?를 계속 생각하면서 봤습니다. 제가 남들 재미없다는 영화도 왠만한면 그냥 참고 견디는데... 이건 정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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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디누김
09:13 · 106.♡.160.72
함. 보고싶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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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그차나
09:13 · 106.♡.202.208
시작부터 불호인분들은 왜 그랬을까 궁금했는데 납득은 안되네요. 그냥 보기전부터 부정적인 느낌으로 보신거같은 감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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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whocares
→ 그차나 작성자
09:19 · 58.♡.171.77
처음 부분은 좋았습니다. 그런데 중간에 외계인의 시점 쇼트가 나올 때 과하다고 생각했고, 외계인의 눈물이 나오는 장면부터 불호로 접어들었던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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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IKnowNothing
→ whocares
09:20 · 61.♡.26.76
이동진님 해설을 보면 그부분이 좀 더 이해가 잘될거에요
- 파
파이어러
09:13 · 182.♡.165.101
지금 이재명 정부를 보는듯 했습니다. 적당히를 모르고, 선을 넘고, 오만하고, 지지자와 관객을 농락하고..그러다 망하겠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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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연성 따위는 없는 영화입니다. 보는 내내 좀 화가 나더군요. 극불호 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