희랍어 시간 - 한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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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강 작가님이 2011년에 썼던 장편소설입니다.
최근에 희랍어 시간을 포함한 단편소설과 시, 산문을 묶어 '디 에센셜 한강'이란 작품집으로 다시 나왔죠.
저는 디 에센셜 한강을 읽었는데, 일단 이 작품집 페이지 수의 60% 가량이 희랍어 시간이라서, 다른 단편 소설과 시, 산문에 대한 감상은 차후에 하도록 하고, 일단 희랍어 시간에 대해서만 써보겠습니다.
일단 책이 굉장히 어렵습니다. '소년이 온다' 나 '작별하지 않는다' 와는 다르게 가상의 인물들과 가상의 시대(스마트폰 얘기가 나오는 걸로 봐서는 작품이 나온 2010년도 즈음인 것 같긴 합니다), 가상의 사건들을 배경으로 한 장편 소설이고, 소재 자체가 희랍어, 즉, 고대 그리스어를 비롯한 플라톤의 이데아 사상이 주요 소재라서, 이에 대한 배경 지식이 조금도 없는 상태에서는 책을 이해하는 것 자체가 힘듭니다. 해서 책의 주요 배경과 소재, 구성 등에 대한 해설 유튭 영상을 첨부합니다. 이걸 텍스트로 일일이 다 치려면 너~~~~~~~~~~~~~~무 길어지거든요
일전에 소년이 온다를 끝까지 다 읽었기에 이 책 또한 아무런 배경지식 없이 그냥 무작정 읽어도 되겠거니 했는데 그건 너무 오만한 생각이었습니다.
제 예상을 깨고 저를 당황시켰던 부분은, 화자가 둘임에도 이를 숫자로 표기된 소단락 표시 외에는 특별히 구분표시가 없이 이야기가 섞여 있으며, 심지어는 시간과 공간이 일정하지 않고 왔다갔다 뒤죽박죽이다 보니 이를 구분하는 것이었습니다. 처음 읽을 땐 화자가 2명이라는 것도 모르고 뭔가 이야기가 이상하게 튄다, 왜 이럴까 하고 그냥 아무 생각 없이 읽다가 중반부가 되어서야 화자가 둘이란 걸 겨우 깨닫고서는 일단 1회독을 어거지로 하고 난 다음에 다시 한번 더 읽어서 겨우 구성을 파악했드랬죠.
왜 이렇게 뒤죽박죽 여자의 이야기와 남자의 이야기가 왔다갔다 일정한 규칙도 없이 섞여서 시간과 공간이 널뛰기를 하도록 구성했는지는 아직도 모르겠습니다. 다만, 플라톤의 이데아 이론의 기준으로는 결함 투성이의 열등한 존재들인 두 사람이 각자의 삶을 지탱하고자 찾았던 최후의 보루가 희랍어였고, 그 희랍어는 아이러니하게도 그들을 열등한 존재라 규정하는 이데아 이론의 주창자 플라톤의 언어라는 점이 인상적이었습니다. 말을 잃고, 눈을 잃고, 이데아 이론에서 말하는 대로 각자의 세상에서 열등한 존재들이 되어서 모든 것을 잃고 도태되어 가며 절망과 좌절 속에서 마지막 희망의 끈을 찾던 두 사람이 각자의 마지막 희망의 끈으로 붙잡은 희랍어를 매개로 만나 서로에게 마음을 열고 치유의 문을 열어가는 과정은, 굉장히 단면적으로 이 소설을 이해하고 인물들을 간단하게 몇 마디로 평가하기는 정말 어렵겠구나, 그래서 쉬운 소설이 아니구나 싶었습니다.
특히 소설 막바지에 안경이 깨져서 장님이나 마찬가지인 남자는 말이 되어 주고, 눈으로 보고 귀로 들을 수는 있지만 말을 할 수 없는 여자는 눈과 귀가 되어 주며 서로를 보완해 주면서 어색하고 불편하나마 의사소통을 하며 마음을 열어 가는 모습은, 이데아 이론에 부합하는 정상인들의 눈에는 답답해 보일 수 있을지라도, 신체적, 정신적 장애를 타인에게 드러내고 극복해 나가기 보다 감추고 웅크리고 움츠러들고 숨어들기만 했던 그들이 서로에게는 자신의 모습을 오픈하고 마음을 열며 이겨 내려 하는 단계에서 끝나는 열린 결말은, 참 쉽게 결론을 단정지어서 말하기 어렵구나 싶은 깊은 여운을 남깁니다.
이 소설은 T적인 분석과 체계적인 정리를 하고 기계적인 분석으로 접근하기에는 적합하지 않습니다. 특히나 한강 작가님의 소설 문체가 인물들의 심리나 감정 등을 직설적으로 드러내고 시원시원하게 이야기를 이끌어 가는 게 아니라, 느린 호흡과 시적인 간접적인 묘사, 아주 디테일하면서도 때로는 추상적인 표현들을 많이 쓰기에, 뭔가 딱 떨어지는 말로 이 책을 읽고 난 후의 느낌을 표현하기는 힘든 것 같습니다. 그만큼 생각할 게 많고, 이 '희랍어 시간'을 쓰고 난 후 작가님이 3년 뒤에 '소년이 온다'를 썼기에, 작가님의 초기 작품 세계를 이해하는 데 좋은 작품이라 생각합니다.
baldur님의 댓글
좋은 설명 감사합니다.
그나 저나 언제 다 읽으려나 모르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