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줄 글쓰기] 오늘의 한 단어 - 패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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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스마다 공격 패턴이 있으니 잘 관찰해서 하나씩 깨는 게 게임의 묘미다.
수십, 수백 번을 보고 외우는 고인물 수준이 되면 어떤 보스라도 한대도 맞지 않고 클리어할 수도 있다.
게임은 죽더라도 다시 할 수 있어서 모든 패턴을 외울 때까지 열 번, 스무 번 도전할 수 있었다.
그런데 이게 무슨 일일까?
분명 게임을 하다가 잠깐 잠들었는데 내가 그 게임 속에 들어와 있다.
소울류 SF 액션 게임이다.
나는 뇌와 심장만 사람의 것이나 나머지는 모두 기계장치로 된 사이보그다.
게임 1레벨의 사이보그는 인간보다 몸이 조금 튼튼할 뿐 힘은 인간과 대동소이하다.
출입구를 열고 멈춰 선 우주선을 탐사하면서 안드로이드들과 싸워서 그들의 부품을 얻어야 몸을 개조할 수 있다.
그런데 문제는 내가 게임을 참 못한다는 것이다.
출입구 앞 문지기도 이기지 못해서 던져두었다가 몇 년 만에 다시 게임을 꺼내 들었고 그 안으로 들어왔다.
문지기한테 정확히 50번 죽고 게임을 접었었다.
출입구를 열기 전에 몸을 점검했다.
아무런 무기가 없는 맨손이지만 도약력이 뛰어나다.
몇 번은 펄쩍펄쩍 뛰며 공격을 피할 수 있을 거다.
출입구에 손을 댔다.
지문인식기가 빛이 나더니 지잉 문이 열렸다.
문 앞에는 네모난 박스가 공중에 떠 있다.
박스에 달린 카메라가 나를 보고 붉은빛을 냈다.
그리고 다관절의 가는 팔이 튀어나오더니 식칼만 한 레이저 블레이드를 작동시켰다.
슈웅! 슈웅!
레이저 블레이드를 옆으로 한번 위아래로 한번 그으면서 다가왔다.
패턴이랄 것 없는 단순한 움직임.
기다렸다.
슈웅!
다리에 힘을 주고 바닥을 박차고 뛰어오르는 순간.
슈웅!
좌우로 긋던 레이저 블레이드를 대각선으로 그었다.
서걱!
뛰어오르던 내 몸이 대각선으로 잘렸다.
·
·
·
눈을 뜨는 출입구 앞이다.
게임 속으로 들어왔다고 생명도 여러 개가 주어진 모양이다.
아, 팔뚝에 그어진 게 문신이 아니라 생명이었나 보다.
분명 다섯 개였는데 네 개로 줄어있다.
소울류 게임의 현실판을 5코인 만에 클리어하라는 건 그냥 죽으라는 것과 다름없다.
하지만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
눈을 감고 문지기의 패턴을 머릿속으로 떠 올리다가 다시 출입구에 손을 댔다.
지문인식기가 빛이 나더니 지잉 문이 열렸다.
벗님님의 댓글
문지기의 패턴을 익히고,
첫 번째 공격을 피한 순간, 문지기는 흥미로운 듯 나를 바라보았다.
고개를 살짝 갸웃하더니, 곧 전혀 다른 움직임으로 들어간다.
반짝이는 붉은빛이 각도와 리듬을 잃지 않으면서 교묘히 변하는 패턴을 그린다.
레이저 블레이드는 물결처럼 공기를 가르고,
팔이 늘어졌다 줄어들면서 새로운 궤적을 만들어낸다.
마치 나를 테스트하려는 듯한 완급 조절.
나의 움직임을 읽고 반응하듯이,
그 속도와 강도를 미묘하게 달리해가며 나를 뒤흔든다.
당황한 나는 어깨부터 손끝까지 굳어간다.
이 변화된 패턴이 단순히 가벼운 변주인지,
아니면 또 다른 함정으로 변형될지 알 수 없는 상황에서 숨이 거칠어진다.
지금껏 반복해서 패턴을 익혔다고 생각했지만,
이 새로운 흐름 앞에서는 모든 준비가 무색해진다.
일시적인 변화일까?
아니면 이제부터가 진짜 싸움의 시작인 걸까?
온 몸의 감각을 곤두세우며 뇌리로 온갖 계산과 판단이 스쳐간다.
하지만 모든 것이 허사다.
불현듯 공포와 혼란이 덮쳐온다.
그 모든 예측과 대비가 파편처럼 흩어져버린다.
'질문은 단 하나. 네가 겁이 없느냐, 있느냐. 그 답이 여기 있다.'
눈을 질끈 감는다.
고개를 숙이고, 다리를 구부리며 중심을 낮춘다.
그리고 있는 힘껏, 문지기에게로 뛰어든다.
주먹을 쥔 손을 앞으로 뻗으면서 그와 대면할 결심을 다지며.
순간 나의 몸이 문지기 바로 앞으로 날아든다.
내가 다가오는 모습에 문지기는 잠시 멈칫한다.
그리고 갑자기 그가 두 팔을 쫙 펼치며 움직임을 멈춘다.
미묘한 정적이 공간을 가득 메운다.
차가운 기계의 전원이 꺼진 듯한 고요함이 일순간 깔린다.
내 숨소리, 거칠게 쏟아내는 입김이 고스란히 들린다.
얼굴과 몸의 경직된 근육이 풀어지려는 찰나,
나는 그와 눈앞에서 맞선다.
그의 카메라가 나를 정면으로 응시하고,
나 또한 그의 붉은빛을 마주 본다.
순간
이 공간에 남겨진 온기와 습도가 온몸을 휘감고,
긴장의 고삐가 서서히 느슨해진다.
단지 나의 목숨을 노리고 있는 기계일 뿐인 줄 알았는데,
문지기는 지금 침묵을 유지하며 나를 본다.
그와 나 사이,
뚜렷하게 그어진 선이 있었다.
그것은 전투를 의미하는 것인지,
경계와 이해를 필요로 하는 지점인지 모른다.
갑작스러운 이 정지의 순간이 어떤 의도를 담고 있는지 알 수 없지만,
그와 마주한 내 심장은 고동친다.
그저 싸우는 것이 아닌,
내가 무엇을 마주하는지에 대한 물음이 다시 솟구쳐 오른다.
이 게임 속 세상에서,
나와 문지기 사이에 흐르는 어떤 교감과 도전.
싸움을 넘어서,
한 인간과 기계 사이에 오가는
초월적 연결이 잠시 스쳐가는 듯한 순간..
잘 쓰셨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