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모앙 커뮤니티 운영 규칙을 확인하세요.
X

'14가지 이야기' 중 이야기 #7..

페이지 정보

작성자 no_profile 벗님
작성일 2025.02.27 14:49
분류 글쓰기
90 조회
1 추천

본문

기억은 조각난 채 남아 있다.


아무리 더듬어봐도 내가 무엇을 했던 것인지 도무지 기억이 나지 않는다.

손목이 저리도록 안간힘을 썼던 것 같은데, 왜 그랬었는지, 무엇을 했던 것인지.


학창 시절 나는 인근 학교까지도 소문난 꽤 똑똑한 아이였다.

영특하다기 보다는 기억력이 뛰어난, 선생님의 말씀을 하나도 놓이지 않았던,

학교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들은 물론, 아이들 간에 일어났던 오만가지 일들,

아주 사소한 대화들까지, 나는 모든 것들을 기억하고 있었다.


동창생들과 함께 하는 술자리에서 그들은 내게 '맞아, 그때 뭐라고 했었지?',

'음.. 내가 기억하는.. 그게 맞지?'라며 나의 기억을 소환시켰다.

토씨 하나 틀리지 않는 나를 그들은 추억으로 소환하는 기록관처럼 여겼다.

물론, 이게 항상 좋은 것 만은 아니라서, 불편한 진실조차 잊지 않는 내가 있기에,

그런 부분들에 대해서는 서로 모르는 척, 혹은 잊어버린 척 넘겨버리곤 했다.


잊혀지지 않는 기억력이 선물이었을까,

혹은, 내 스스로 벗을 수 없는 무거운 짐이었을까.


필름이 끊기는 기억을 처음 해본 것은 부어라 마셔라 찐하게 진행되었던 어느 술자리였다.

이른 아침, 눈을 떴는데 머릿속이 한 웅큼 뽑혀버린 듯 했다.

이해되지 않는 생경한 기분,

기억의 일부분을 잃는다는 것이 이런 것이구나 하고 어찌 해야할 바를 몰랐다.

숨막히는 이 불편한 망각의 경험, 도대체 다른 이들은 어떻게 이런 걸 참고 견디는 거지.

'기억 나지 않아, 나.. 그때는 잘 모르겠는데'

흔하게 듣던 그들의 말이었다.


정신을 잃을 정도로는 마시지 않는다는 선은 이 경험을 거치며 굵게 그어졌다.

기억을 잃는다는 건 내 자신을 잃을 것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비어버린 그것은 내내 비워진 채 그렇게 내 기억 속에 공백으로 남아 있었다.

나는 그 이후로 기억을 잃게 될 가능성을 되도록 차단하는 생활을 지속했다.


그런데, 지금 이게 무슨 일인가?

더 이상 끼워 맞출 수 없는 파편들이 바닥에 흩어져 있다.

나는 무엇을 했던 것인가, 나는 무슨 짓을 했던 것인가.



// '14가지 이야기'를 써봅시다.

https://damoang.net/writing/3346



끝.

1추천인 목록보기
댓글 0
홈으로 전체메뉴 마이메뉴 새글/새댓글
전체 검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