옛날에 써둔 무협소설 세번째 장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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맥을 짚는 늙은 의원의 눈살이 살짝 찌푸려졌다가 펴졌다. 대수롭지 않은 척하려 했지만, 눈꼬리가 기묘하게 떨렸다.
“좋지 않지요?”
파리한 안색의 미녀, 구양연이 물었다. 겨울을 나는 동안 한결 수척해져 있었다.
“고만고만해. 몸은 좀 어떤가?”
“한질이 올 때 추운 건 예전보다 덜 해졌는데, 몸에 기운이 하나도 없어요.”
의원, 하크만이 고개를 작게 끄덕였다.
“식사를 잘 챙겨 드시게. 입맛이 없어도 꼭 먹어야 하네.”
“열심히 먹고 있어요. 겨우내 그이가 잘 보살펴 줬답니다.”
천산의 겨울은 냉혹하다. 살아있는 모든 것에게 가혹한 날씨였기에, 산중에 마을을 이루고 사는 이들은 미리 겨울을 날 채비를 마치고 겨울 동안 움직임을 최소화한다.
그러나 하크만 의원은 겨울에도 한 달에 한 번씩 왕진을 왔다. 그를 업고 얼어붙은 산길을 오가며 약을 타 온 것이 바로 엽성이었다. 혼자 다니기도 위험한 길을 사람을 둘러업고 올라온 엽성을 보고 아시나 마을의 사냥꾼들도 혀를 내둘렀다.
겨울 동안 집안 살림을 도맡다시피 한 사람도 엽성이었다. 구양연이 돕겠다 조르고 졸라 겨우 간단한 조수 노릇만 할 수 있었다.
“이렇게 예쁜 색시를 얻었는데 당연히 잘 살펴야지, 흘흘흘. 다 됐으니 나는 그만 가보겠네. 약은 내가 맞춰서 배합을 조금 바꿔줌세.”
“힘든 길 오셨는데 식사라도 같이하고 가세요. 금방 준비해 올게요.”
“됐네, 됐어. 병자가 무슨 식사를 차린다고…….”
두 사람이 가벼운 실랑이를 하는데 문이 열리고, 밥상을 손에 든 엽성이 들어왔다.
“벌써 다 차렸습니다. 함께 드시지요.”
하크만이 마지 못한 척 함께 앉아 식사를 함께했다. 중원의 방식으로 조리한 나물 반찬 몇 가지와 위구르식 양고기 요리가 함께 나온 소박한 밥상이었다.
아시나 마을에서 한 계절을 보내는 동안 젊은 부부는 위구르의 풍습에도 점차 익숙해졌다. 구양연은 이제 몽골어와 위구르어 모두에 능통할 정도였고, 엽성도 위구르어로 의사 소통이 가능해졌다.
여유로울 때 구양연은 한어를 배우기 원하는 아이들을 모아놓고 한어를 가르치기도 했다. 개중에는 글공부를 원하는 아이들도 있어 천자문을 떼고 소학(小學)에 접어든 아이들도 있었다. 그녀는 뛰어난 학생인 동시에 좋은 스승이었다.
“한족의 음식도 먹어버릇하니 입에 맞구만.”
하크만 의원은 만족스럽게 식사를 마쳤다. 구양연도 먹을 수 있는 만큼 최선을 다해서 먹었다. 약효를 최대한 끌어내기 위해서는 환자의 체력이 중요한 법이었다.
식사를 마친 엽성과 하크만이 집을 나섰다. 하크만이 지게에 올라 몸을 웅크리자, 엽성이 지게를 메었다.
지게를 멘 엽성의 몸이 미끄러지듯 눈 덮인 산등성이를 올랐다. 천산 남쪽의 투르판, 북쪽의 베쉬발릭 모두 봄이 문을 두드리고 있지만, 천산은 아직이었다.
하지만 시간은 반드시 흐르게 마련이고, 봄은 반드시 찾아올 것이다. 엽성에게는 반갑지 않은 이치였지만.
지게를 꼭 붙잡고 앉은 하크만이 불쑥 입을 열었다.
“회임일세.”
달려가던 엽성의 발걸음이 뚝 멈췄다. 그 바람에 지게 위의 하크만이 덜컹 흔들렸다.
“조심 좀 해! 떨어질 뻔했네, 그려.”
“뭐라고 하셨습니까?”
“태기가 있다고. 약하긴 하지만 내가 짚어보니 그래. 한 보름 뒤에 재보면 돌팔이들도 회임이라고 할 걸세.”
지게 위에서 느껴질 정도로 엽성의 몸이 떨렸다.
“이리된 거 잠깐 쉬어가세. 나 좀 내려주게.”
지게에서 내려온 하크만은 볕이 잘 드는 바위 위에 걸터앉았다. 엽성은 복잡한 얼굴로 꼼짝도 하지 않고 서 있었다.
“어찌…… 되는 겁니까?”
목소리마저 떨렸다.
“자네 처의 병은 나도 처음 보는 병인데, 나라고 어찌 알겠나. 진맥을 좀 더 자주 해봐야겠네. 아이를 낳는 것이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라…….”
하크만은 말끝을 흐렸다. 나날이 기력이 떨어지는 구양연이 무사히 아이를 낳을 수 있을지, 아니 열 달을 버틸 수 있을지도 장담할 수 없는 일이었다.
‘회임을 마음 놓고 기뻐할 수도 없으니……. 참으로 딱하다, 딱해.’
하크만은 마음속으로 혀를 찼다. 이 범상찮은 남녀에게 어떤 숨은 사정이 있는지 다 알지는 못했으나, 불치의 병을 안고 있다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안타까운 사연이었다.
“약의 배합도 좀 달라져야겠지. 지금 쓰는 약재가 태아에게는 독할 수도 있어.”
“……두렵습니다.”
엽성이 툭 뱉은 말에 하크만이 고개를 끄덕였다.
“부모가 되는 게 원래 두려운 일이야. 평생 두렵고 조마조마하지. 그래도…… 할만해.”
부모가 된다. 그녀가 떠나면 나 홀로.
평생 이보다 더 큰 두려움을 느껴본 적이 없었다.
엽성은 고개를 동쪽으로 돌렸다. 우뚝 솟은 성산봉이 그를 굽어보고 있었다. 그러나 엽성의 마음은 그보다 훨씬 멀리, 고향 화산을 달리고 있었다.
스스로 떠났으되 한 번도 잊어본 적이 없는 고향. 그녀가 떠나면 돌아가 목숨으로 죗값을 치르리라 다짐했던 사문.
‘제자는 어찌 죗값을 치러야 할는지요.’
숨을 깊이 들이마셨다. 차가운 공기가 폐부를 찌르며 머리가 약간 맑아지는 느낌이 들었다. 흔들리던 사내가 산처럼, 바위처럼 굳센 기세를 회복했다.
“진정이 되었는가? 이제 가세, 그럼. 나도 약재 배합을 달리하려면 궁리할 시간이 부족하니.”
하크만을 지게에 업은 엽성이 다시 움직였다. 이번에는 멈추는 일 없이 울룬 마을까지 한 번에 당도했다.
“어떤 약재가 필요합니까?”
“대충 생각은 해뒀네. 마을에서 구할 수 있으니 걱정 말게. 천산설련이 있으면 더 바랄 나위가 없겠지만…….”
지난 겨울 엽성은 구양연을 돌보는 짬짬이 천산설련을 구하기 위해 눈 덮인 산을 헤매고 다녔다. 그 과정에서 도움을 준 이들이 울룬 마을의 약초꾼들이었다.
아시나 마을이 사냥꾼들의 마을이라면, 울룬 마을은 약초꾼들의 마을이었다. 하지만 울룬 마을의 약초꾼 중에서도 천산설련을 직접 채취해 본 이는 세 손가락 안에 꼽을 정도였다.
엽성은 그들에게서 천산설련의 자생조건, 캐는 방법 등에 대해 상세히 배울 수 있었다.
경험 많은 약초꾼들의 설명에 따르면 천산설련은 일정한 높이의 산악 지역에서만 자란다. 여기서 말하는 일정한 높이란 아시나 마을과 울룬 마을이 자리 잡은 극자봉의 정상보다도 높은 위치였으니, 산 아래 사람들은 접근 자체를 엄두도 못 낼 정도였다.
거기에 이 기이한 식물은 서식지의 높이가 높을수록, 토양이 척박할수록 더 크게 꽃을 피웠고 약효도 좋았다. 사람이 접근하기 용이한 지역에서 자라는 놈들은 그만큼 일찍 꺾이기 때문에 그렇다는 것이 약초꾼들의 견해였다.
엽성은 그들이 천산설련을 채취했다고 지목하는 장소들을 둘러본 후 그와 유사한 장소들을 찾아 다녔으나 성과가 없었다.
“백 년이 넘은 천산설련은 나도 평생 본 적이 없네. 윗대에서 전해 내려오는 이야기는 들었지만, 워낙 허풍 섞인 이야기라…….”
천산설련이 한 번 꽃을 피우는 데 통상 팔 년가량의 시간이 걸린다. 그 오랜 시간을 인고하여 피운 꽃이 한 번 지고 나면, 또 그만큼의 시간을 기다려 꽃을 피운다.
그러니 백 년이 넘은 뿌리란 사시사철 눈 덮인 설산의 험준한 절벽에서 한 번 피기도 어려운 꽃을 열 번도 넘게 피웠다는 뜻이다. 그토록 강인한 생명을 어디서 만날 것인가.
“아내에게 남은 시간이 고통이 아니라 행복이었으면 합니다. 그 소망을 이룰 다른 수단이 있겠습니까?”
하크만은 대답하지 못했다. 문득 먼저 떠나보낸 아내가 떠올랐다.
* * *
엽성은 발걸음을 한 김에 울룬 마을의 약초꾼들을 하나씩 찾아다니며 천산설련을 구해달라고 신신당부했다.
몇 년이 된 놈이건 상관없고, 가격도 얼마든 쳐줄 수 있으니 꼭 자신에게 팔라고. 혹, 사람의 손이 닿을 수 없는 지역이라면 자신에게 알려주기만 해도 설련 값을 쳐주겠노라고.
울룬 마을의 약초꾼들도 그의 사정을 대충 알고 있는지라, 다른 말 하지 않고 선선히 승낙했다.
“찾기만 하면 당신에게 가장 먼저 알려줄 테니 걱정 마시오.”
엽성은 그래도 마음이 놓이지 않아 약초꾼들에게 두 번, 세 번 다짐을 받은 후에야 집으로 돌아왔다.
엽성이 돌아와 보니 셍게의 처 카미시가 두 딸을 데리고 와 구양연과 담소를 나누는 중이었다.
“숙부, 다녀오셨어요?”
셍게의 두 딸 구리와 아리가 예의 바르게 인사했다.
아시나 마을 아이들은 마을의 어른들을 숙부, 숙모라고 부르며 가족처럼 따랐다. 엽성과 구양연도 한 계절을 함께 지내는 동안 마을의 가족으로 대접받고 있었다.
셍게의 두 딸은 엽성과는 다소 데면데면했지만, 구양연을 아주 잘 따랐다.
엽성이 집을 비우면 항상 구양연의 곁에 찰싹 붙어서 아리따운 숙모가 심심할 틈을 주지 않았다. 구양연이 앓아누운 어느 날은 자매가 함께 천산의 산신에게 기도를 올릴 정도였다.
따지고 보면 구양연에게 호의적인 것은 그들만이 아니었다.
본능적으로 아름다운 것을 좋아하게 마련인 어린아이들은 모두 그녀를 사랑할 수밖에 없었다. 또한 나이가 많건 적건 사내라면 그녀에게 나쁜 감정을 가질 수 없었다.
심지어 마을의 아낙들도 성품이 온화하고 싹싹한 구양연에게 우호적이었다. 거기에 알음알음 그녀의 몸 상태에 관한 이야기가 퍼지며, 마을 전체가 젊은 이방인 부부를 오래된 제 식구인 양 감싸게 되었다.
“우리가 너무 오래 놀았나 보네요.”
카미시가 힘겹게 몸을 일으켰다. 이제 산달이 두 달도 안 남은 그녀는 배가 한껏 부풀어 있었다.
카미시는 아시나 마을의 부인들 가운데서는 드물게도 드러내놓고 남편을 구박하지 않는 온화한 여인이었다. 온화함이라는 공통점이 그녀와 구양연을 가깝게 만들었다.
“아닙니다, 형수님. 항상 제 처를 돌봐주셔서 감사합니다.”
위구르인들은 한인만큼 남녀 간에 내외하지는 않았지만, 남의 집 사내와 부인인지라 아무래도 사이가 어색했다. 아슬은 서둘러 아이들을 데리고 집으로 돌아갔다.
“추운 날 먼 길 오가느라 고생하셨어요. 따뜻한 차 한잔하세요.”
마침 카미시를 대접하느라 차를 마시던 참이었다. 구양연은 다기에 새 흑차 잎을 넣고 따뜻한 물을 부었다.
“따뜻하구려. 고맙소.”
엽성 같은 내가고수가 겨우 이 정도 날씨에 추위를 느낄까마는 고맙다는 말은 진심이었다. 그저 모든 것이 고맙고 미안했다.
“의원께서 뭐라고 하시던가요?”
하크만의 기색이 평소와 다르다는 것을 구양연도 느낀 모양이었다.
그녀의 예민한 감각과 지성은 누구로부터 물려받은 것일까. 명왕교주도 그녀와 같을까. 잠시 쓸데없는 생각이 엽성의 머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태기가 있다고 하시오.”
엽성은 담담히 말하며 애써 미소를 지었다. 그의 눈에 구양연의 모습이 아주 느리게 담겼다.
방금 무슨 말을 들었는지 모르겠다는 듯 어리둥절한 기색이 아주 잠시 머물렀다가.
믿을 수 없다는 듯 눈동자가 커졌다가.
그게 사실이냐는 듯 흔들리는 눈빛으로 엽성을 살피다가.
마지막에는 눈물이 왈칵 차올랐다.
“상공…….”
두 손으로 얼굴을 가린 그녀는 말을 잇지 못했다. 엽성이 다가가 아내를 감싸 안았다. 온기가 그녀의 몸을 덮었다.
“전 오래 살 거에요.”
“당연한 말이오.”
“건강한 아이를 낳고, 그 아이를 안아볼 때까지 꼭 버틸 거에요.”
“당신을 똑 닮은 아이를 만날 거요.”
구양연은 가녀린 어깨를 들썩이며 흐느꼈다.
“사랑하는 이와 평범한 일상을 누리고, 그를 닮은 아이를 낳고……. 저는 누리지 못할 행복인 줄 알았어요.”
엽성의 가슴도 함께 벅차올랐다. 구양연을 끌어안은 손에 힘이 더해졌다.
천산에도 봄이 찾아오고 있었다.
제가 좋아하는 장면이라 이번에는 한 회차를 통으로 올렸습니다
벗님님의 댓글

구양연을 그 모습을 바라보며 볼을 타고 내리는 눈물을..
이런 모습이 그려집니다.
재미있는 글 잘 보고 갑니다. ^^
현이이이님의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