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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전에 쓴 무협 소설 네번째 장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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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2025.04.21 10: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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터덜터덜 돌아가는 발걸음에 힘이 없었다. 약초를 담는 망태기에는 반찬거리로나 쓸 나물 몇 가지만 담겨있었다.

사내는 멍한 얼굴로 언덕을 올랐다. 멀지 않은 거리에서 밥 짓는 연기가 피어오르고, 아이들의 노랫소리가 들렸다. 넋을 잃고 소리를 따라 걷다가 마을 어귀에서 이르러서야 정신을 차렸다.

후우.

깊이 숨을 들이마시고 마음을 추슬렀다. 얼굴에서 애써 낙담을 지웠다.

사내, 엽성은 지난 닷새 동안 천산설련을 찾아 다녔지만, 그 흔적도 찾지 못하고 빈손으로 돌아오는 길이었다.

사실 그가 천산설련을 찾아다닌 것은 지난 닷새에만 국한된 이야기가 아니었다. 작년 겨울부터 올봄까지 그는 시간이 날 때마다 천산을 누볐다.

특히 구양연의 임신을 알고 난 지난 두 달 동안은 두어 차례 사냥에 참여한 것을 제외하면 그 외의 시간은 구양연을 돌보거나, 천산설련을 찾는데 시간을 쏟아부었다.

드넓은 천산을 뒤지는 데 가장 큰 어려움은 구양연을 간호하는 것이었다. 하크만 의원이 약재의 배합을 바꾼 후 열흘에 한 번이던 보명환의 복용 주기가 이레에 한 번으로 짧아졌다. 의원은 조만간 닷새에 한 번으로 주기를 단축해야 할 것 같다고 말했다.

복용 주기에 맞추어 집으로 돌아오다 보니 엽성의 활동 반경이 크게 제한되었다. 때문에 이번 출행은 최대한 시간을 넉넉하게 잡고, 전력으로 신법을 펼쳐 성산봉 일대를 집중적으로 탐색했다.

성산의 주봉인 성산봉은 드높은 여러 봉우리 중에서도 압도적인 위용을 자랑하며 사람의 접근을 불허했다. 오직 천산파의 개파조사, 천산신응(天山神鷹)만이 그 꼭대기에 올라 등선(登仙)하였다는 전설이 전해졌다.

산을 오를수록 날씨가 추워지고, 공기가 희박하여 엽성과 같은 고수도 움직임에 제약을 겪었다. 악조건을 무릅쓰고 그 근처의 봉우리와 골짜기를 헤집었으나 아무 소득이 없었다.

돌아오는 동안 고통에 시달렸다.

희망이 사그라지는 고통.

그러나 그 고통을 어찌 그녀의 앞에서 내색할 수 있으랴.

엽성이 마을에 들어서자 한데 모여 뛰어놀던 아이들이 쪼르르 달려와 인사를 하고는 다시 제자리로 돌아갔다.

마당에 앉아 활을 손질하던 이르긴이 엽성을 발견하고는 반갑게 다가왔다.

“여, 오랜만일세. 잘 다녀왔는가?”

말을 하며 엽성의 표정과 망태기를 힐끗 훑어봤다.

구양연의 병이 무엇인지는 몰라도, 그 치료에 천산설련이 필요하다는 것은 대강 안다. 하지만 눈치를 보니 이번에도 구하지 못한 모양. 이럴 때는 말을 아끼는 것이 최선이라는 것을 젊은 위구르인 사냥꾼은 아주 잘 알고 있었다.

“덕분에. 마을에는 별일 없었나?”

“셍게 형님이 아들을 낳았어. 곧 잔치가 열릴 거야.”

이르긴이 씩 웃으며 엄지손가락으로 셍게의 집 쪽을 가리켰다. 자식이 태어나고 며칠이 지나면 잔치를 열어 축하하고, 아이의 이름을 공표하는 것이 그들의 풍습이었다.

“좋은 일이로군. 아들을 원하시더니. 형수님은?”

“부인들 말씀으로는 아주 건강하다 하시네.”

아시나 마을에서는 촌장 쿠틀룩과 왕연덕의 처가 산파 역할을 했다. 마을의 아이들 대부분이 그네들의 손을 거쳤다. 그들이 건강하다 진단했다면 믿을 만했다.

“셍게 형님이 형수님 수발을 드느라 며칠째 집 밖으로 나오지도 못하고 있다네. 아주 좀이 쑤실 게야. 자네도 잔치 때나 돼야 형님 얼굴 볼 수 있을 걸세.”

엽성은 엷게 웃으며 이르긴과 인사를 나누고 걸음을 옮겼다.

드디어 집이다. 수심은 마음속 깊은 곳에 가라앉히고, 얼굴에는 작은 행복만을 담은 채 문을 열었다.

“다녀왔소.”

나직한 목소리가 오두막을 부드럽게 채웠다. 총총 가벼운 발걸음 소리가 그 뒤를 이었다.

“왜 이제야 왔어요.”

구양연이 와락 안겨들었다. 향긋한 살냄새가 엽성의 코를 간질였다. 굵은 팔이 그녀의 허리를 감았다. 배가 조금씩 나오기 시작한 것을 눈으로 알아볼 수는 없었지만, 팔로 감싸 안으니 느낄 수 있었다.

“미안하오.”

진심을 담았다.

구양연이 그의 두 뺨에 손을 얹고는 눈이 마주치자 곧바로 입을 맞췄다.

“보고 싶었다구요.”

가욕관을 넘기 전과 넘은 후의 그녀는 아주 다른 사람 같았다. 지금의 그녀는 하루하루, 모든 순간에 진솔하게 임하고 있었다.

“오는 길에 산나물을 좀 캐왔소. 데쳐서 양고기와 함께 먹으면 궁합이 아주 좋을 거요.”

두 사람은 함께 저녁을 준비했다. 엽성은 닷새 만에 다른 사람과 함께 하는 식사였다.

“그간 식사는 어떻게 했소?”

“구리, 아리가 우리 집에 와서 같이 먹었어요. 그 아이들 손이 얼마나 빠른지 몰라요. 요리도 척척 잘 도와주던걸요.”

셍게의 처가 아이를 낳는 동안 그 딸들을 구양연이 돌봐준 모양이었다.

“그래도 내 낭군과 함께 먹는 밥이 제일 맛있어요.”

“나도 그렇소.”

부부가 함께 웃음 지었다.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며 식사를 하던 중 돌연 구양연이 입을 다물었다. 그녀의 얼굴에서 고민의 기색을 읽은 엽성은 말없이 기다려주었다.

“나…… 상공과 더 많은 시간을 함께 보내고 싶어요.”

“…….”

“이제 찾을 수 없는 것에 집착하지 말고 상공의 시간을 온전히 내게 줘요. 살아있는 동안 당신과 더 많은 즐거움을 함께 누리고 싶어요. 그리고 그 추억을 상공이 우리 아이에게 전해줘요.”

“……그럽시다.”

마주 본 두 사람의 눈에 똑같이 눈물이 고였으나, 입가에는 똑같은 미소가 번졌다.


며칠 뒤 셍게의 집에서 잔치가 열렸다. 아직 몸이 덜 풀린 셍게의 처, 카미시를 위해 마을 아낙들이 팔을 걷어붙이고 나섰다.

아시나 마을에서는 아이가 태어나면 보름 동안 외부인과의 접촉을 금한다. 그리고 보름째가 되면 잔치를 열어 사람들에게 아이를 보이고, 이름을 지어주었다. 손님들은 아이를 위해 선물을 주고 축복을 해주는 것이 전통이었다.

마을 최고의 사냥꾼이자, 사냥꾼들의 우두머리인 셍게의 아들이 태어났으니 자연스레 잔치도 떠들썩했다. 특히 연달아 두 딸을 낳고 처음으로 얻은 아들이라 더욱 관심이 집중되었다. 울룬 마을에서도 하크만 의원을 비롯한 축하객들이 찾아왔다.

셍게 부부가 아들을 안고 마당으로 나오자 마을 사람들 사이에서 웃음이 터졌다.

“와하하! 셍게가 셍게를 낳았구만!”

“호호, 자기 아빠 닮았으면 부모 속 에지간히도 썩이겠다.”

“고놈 씩씩하게도 생겼네.”

셍게의 입이 귀에 걸리고, 카미시는 수줍게 입을 가렸다.

“이 셍게가 드디어 아들을 낳았습니다. 아이의 이름은 카사르입니다!”

셍게가 아이를 번쩍 들어 보여주자 박수갈채가 쏟아졌다.

“좋은 이름이다! 셍게의 아들 카사르는 그 이름에 걸맞은 사람이 될 거다!”

아시나 마을의 촌장 쿠틀룩이 가장 먼저 축원해주었다. 몽골어와 위구르어로 카사르는 용맹하다는 뜻이 있었다. 초원의 뛰어난 용사들이 많이 쓰던 이름이었다.

뒤이어 손님들이 차례대로 아이에게 축복의 말과 함께 선물을 내놓았다. 울룬 마을의 약초꾼들은 아이와 산모에게 좋은 약초들을 선물로 가져왔다. 아시나 마을 주민들은 저마다 장난감 활, 가죽옷과 신발, 재물 등을 내놓았다.

엽성 부부는 구양연이 손수 지은 아기용 솜옷과 비단옷, 천자문 한 권 그리고 부담스럽지 않을 정도의 은자를 선물로 주었다. 축복의 말은 구양연이 했다.

“카사르가 이 옷을 입고 튼튼하게 자라서 이름처럼 용감하면서도 지혜로운 사람이 되길 바랍니다.”

다음은 흥겨운 잔치였다. 카미시는 우는 아기를 데리고 집으로 들어가고, 셍게가 손님들을 접대했다. 술과 음식, 정(情)이 가득한 잔치였다.

사람들 틈에 섞여 잔치를 즐기던 구양연이 문득 엽성의 소매를 붙잡고 속삭였다.

“우리 아이도 이런 축복을 받을 수 있겠죠?”

“세상의 모든 축복을 다 받을 거요.”

엽성이 싱긋 웃으며 대답했다.

“고단할 테니 우리 먼저 들어갑시다. 우리 내일은 함께 소풍이라도 가지 않겠소? 그간 당신과 함께 가고 싶은 곳들이 많이 생겼소.”

“좋아요. 어디 그렇게 좋은 곳을 상공 혼자서 돌아다니나 했어요.”


이튿날 일찌감치 아침밥을 지어 먹은 두 사람이 집을 나섰다. 엽성은 하크만을 업고 다니던 지게에 침낭을 얹은 후 그 위에 구양연을 태웠다. 아직 아침저녁으로는 날씨가 쌀쌀하여 얇은 이불을 둘러주는 것도 잊지 않았다.

“조금 흔들릴 수 있으니 거기 끈을 꽉 잡으시오.”

말과는 달리 엽성의 등은 조금도 흔들림 없이 편안했다.

오늘은 말 그대로 소풍을 가는 날. 급할 것이 없었다. 엽성은 안정적으로 신법을 펼치며 구양연과 함께 풍광을 감상하고,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었다.

극자봉에서 남쪽으로 봉우리 하나만 넘어가면 백양구(白楊溝) 계곡이 나온다. 부부는 졸졸 흐르는 물소리를 들으며 걸음을 옮겼다. 매일 보고 듣던 나뭇잎의 어린 순 하나, 산새들의 지저귐 하나가 모두 새롭고 행복했다.

계곡에서 점심을 먹은 후에는 잠시 손을 잡고 함께 걸었다. 두 사람은 어느새 성산의 초입에 다다랐다.

성산의 초입은 경사가 완만하고 풀이 무성하여 곳곳에 목장이 많았다. 부부는 목동이 소와 말, 양을 치는 모습을 말없이 바라보며 시간을 보냈다.

“천산은 참 모습이 다양한 산 같아요.”

구양연이 입을 열었다.

“겨울의 모습과 봄의 모습이 완전히 다르고, 같은 계절인데도 여기 목장과 저기 정상이 다르네요.”

그녀의 시선이 멀리 성산봉을 향했다.

성산봉은 세 개의 봉우리가 우뚝 솟아 있어 성산연봉 또는 성산삼연봉이라고 부르기도 했다. 투르판과 베쉬발릭 어디에서나 눈 덮인 성산봉을 볼 수 있었으니 가히 신이 산다고 믿을 만한 봉우리였다.

구양연의 말처럼 초록이 우거진 성산의 초입과 만년설을 이고 서 있는 성산봉의 모습은 자못 이질적이었고, 그래서 더 신성해 보였다.

천산이 그들에게 보여주는 얼굴은 가축을 키우는 목장과 성산봉의 만년설뿐만이 아니었다. 그사이 수많은 계곡과 능선마다 다른 지형과 기후, 식생을 보여주고 있으니 실로 천의 얼굴을 보여줬다.

대체로 천산의 초입에는 야트막한 구릉과 초원이 펼쳐졌고, 중턱으로 가면 기후가 서늘하고 건조하였다. 고도가 점점 높아지고 성산봉에 가까워지면 극히 일부의 생물들만 서식할 수 있었다.

하나의 산 안에서도 봉우리에 따라, 높이에 따라 자라는 식물이 다르고, 그것을 먹고 사는 동물이 다르니 그야말로 자연의 신비였다. 천산의 사냥꾼과 약초꾼들이 유명할 수밖에 없는 이유가 있었다.

“어릴 적부터 명왕의 가르침은 온 세상을 비춘다고 배웠어요. 하늘의 해와 달은 변치 않고, 영원히 천지를 굽어살핀다구요. 저 성산봉처럼요.”

엽성은 문득 그녀가 명왕에게 마지막으로 기도를 올린 모습을 언제 보았는가 생각해보았다.

사주를 떠나 하미에 도착할 무렵이었던가. 정확한 때는 기억나지 않지만 아마도 두 사람이 부부의 연으로 맺어지던 그때쯤이었던 것 같다. 하미에 도착하기까지 하루도 빠지지 않고 매일 저녁 향을 피우고 명왕에게 기도를 올리던 모습을 보지 못한 것이.

모든 것을 버리고 따라와 준 남편에 대한 배려인지, 새로운 삶에 충실하기 위해 중원에서의 삶을 모두 버린 것인지. 엽성은 굳이 그 이유를 묻지 않았었다.

“명왕의 법은 무한하고 벗어날 수 없었죠. 그렇지만 누구도 왜 제 어머니와 제가 천형(天刑)을 갖고 태어났는지는 설명하지 못했어요. 그저 명왕께 뜻이 있을 것이니 받아들이라는 말만 들었죠.”

엽성은 그녀의 어깨를 감싼 채 말없이 듣고만 있었다.

“교주의 무남독녀 외동딸이 되어 세상 구경도 제대로 할 수 없었죠. 명왕의 법과 교주의 명에 순종했지만, 마음속에는 항상 자유롭고 싶은 욕구가 있었어요. 저 새처럼요.”

구양연이 하늘 한 가운데를 가리켰다. 날개를 쭉 펴고 크게 원을 그리며 나는 독수리 한 마리가 눈에 들어왔다.

“하지만 새매의 날개도 없는데(亮無晨風翼) 어찌 바람을 타고 날아갈 수 있겠어요(焉能凌風飛)?”

구양연이 처연하게 웃으며 고시(古詩)의 한 구절을 읊었다.

“성공과 함께할 때만이 진정으로 자유로운 시간이었죠. 하지만 지금 와서 생각하면…… 만약 제가 건원지맥이 아니었다면, 섬서신의 어른의 도움을 받지 않았다면 상공을 만날 수 있었을까요? 아마 우린 명왕교주의 딸과 화산파의 대제자로 각자 살아가고 있었겠죠?”

엽성은 대답하지 못했다. 불가에서 말하는 인연을 엽성도 모르는 바는 아니나 깊게 생각해 본 적은 없었다.

“명왕께 어떤 뜻이 있었다면, 모든 것은 지금 이 순간을 위해 존재한 거라고 생각해요. 상공을 만나고, 이 아이를 가지기 위해서.”

구양연의 손이 자신의 배를 살며시 쓰다듬었다. 아주 작은 불씨가 꺼질 새라 조심하듯.

“그래도 이 아이는 저 새처럼 자유로운 삶을 살았으면 좋겠어요. 자신이 원하는 삶을 살 수 있도록.”

“약속하겠소. 세상 그 무엇도 그 아이의 자유를 방해하지 못 하도록 하겠소.”

두 사람은 멀리 초원에 노을이 질 때까지 정답게 앉아있었다.



끝이 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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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1

벗님님의 댓글

작성자 no_profile 벗님
작성일 04.21 11:36
하나의 생명이 지고, 하나의 생명이 일어나는 것일까요..
그들에게 길지 않은 시간이 남는 듯 하여 안타깝네요.

재미있는 글 잘 보고 갑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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