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백제 견훤이 실패한 근본적인 원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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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no_profile 코미 118.♡.12.130
작성일 2024.07.19 11: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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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백제를 세운 견훤은 신라를 적대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신라인이란 정체성이 너무나 강했다는 겁니다. 

먼저 그가 대내외적으로 칭한 칭호가 두개 있습니다. 


신라서면도통지휘병마제치 지절도독전무공등주군사 행전주자사 겸 어사중승 상주국 한남군개국공 식읍이천호

이 칭호를 892년 사용했죠. 

검교태위 겸 시중 판백제군사 지절도독전무공등주군사 행전주자사 해동사면도통지휘병마제치등사 백제왕 식읍이천오백호

이 칭호는 후백제 왕을 칭한 후 사용했죠. 


모두 공통점이 있는데 대장군 직위라 할 수 있는 칭호인 도통을 꼭 붙였다는 겁니다. 서면도통에서 사면도통으로 업그레이드만 했죠. 이는 그가 신라에서 최종으로 받은 비장이란 직위에 집착이 있다는 겁니다. 비장은 지금으로 치면 초급장교지만, 그가 후백제를 세울 때 권한을 행한 수준을 보면 사단장급 이상입니다. 

즉 그는 다른 칭호도 충분히 있는데도 신라에서 출세해 얻은 장군 칭호를 평생 포기하지 못한거죠.


그런 신라인으로써의 집착을 또 보여주는 게 신라를 무너뜨리고 합병할 수 있음에도 왕위를 바로 잡는다면서 경순왕을 옹립하고 신라의 권력을 장악하는 선에서 머문 겁니다. 

이는 다르게 보면 신라란 국가와 왕위를 건들지 않고 그저 신라 최고의 권신이 되고자 한 것과 다름없죠.

공산전투 이후 한 행동을 보면 더 명확한데 신라를 결국 삼키지 않아버렸죠. 


이렇듯 그는 후백제의 왕을 칭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신라인이란 정체성을 떨치지 못합니다. 그래서 경순왕 옹립과 공산 전투란 결정적인 기회를 놓혀버렸죠. 

그에기 있어 신라는 자신의 커리어를 시작한 곳이고 지방 출신이면서도 나름 대우해 준 옛 정을 잊지 못한 것으로 그의 인간미가 느껴지긴 합니다. 

하지만 왕건처럼 냉정하게 신라를 바라보지 못해 결국 그의 약점이 되었으니 아이러니한 일입니다. 


P.S

반대로 왕건은 신라에 큰 은혜도 원한도 없었기에 냉정하게 현실을 판단할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신라도 결국 버틸 수 없던 샘이죠. 

댓글 2 / 1 페이지

하늘기억님의 댓글

작성자 하늘기억 (211.♡.68.45)
작성일 07.19 11:35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혁명은 항상 주변부에서 시작하는 것 같습니다.

건더기님의 댓글

작성자 건더기 (112.♡.35.146)
작성일 07.19 11:44
견훤이라는 사람 자체가 원래 경상북도 상주의 호족 출신인데 근무지로 발령받아 일하던 전라남도 일대에서 자기가 지휘하던 병력 이끌고 쿠데타를 일으킨 것이다보니 본인이 백제인이라는 의식은 없이 그 지역이 옛 백제이다보니 이름만 내걸고 간 것이죠.
(그런데 쓰다보니 기시감이 느껴지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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