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광석이란 이름 -오래된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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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6년 1월 6일 늦은 저녁, 바람이 몹시 불었다. 버스를 타고 친구들과의 약속장소로 가는 길이었다. 뉴스에서 그의 죽음을 알리는 보도가 나왔다. 자살이었다. 시대의 가객이라 불리던 그가 전깃줄에 목을 매고 세상을 떠났다고 뉴스는 전했다. 그날, 대학 부근 술집에서의 만남은 밤이 깊도록 그의 이야기와 그의 노래로 채워졌었다. 잔뜩 술에 취한 친구들과 밖으로 나온 시간, 바람만이 소리 내어 울던 깊은 밤이었다. 1987년의 함성이 사라지고 또 그렇게 우리 곁을 한 친구가 떠나간 날이었다. 1970년대 모던포크의 맥을 이었던 가객, '노찾사'와 '동물원'에서 평범한 사람들의 소박한 삶을 노래했던 우리의 친구, 그의 이름은 김광석이었다.
그로부터 10 여년의 세월이 흘렀다. 그날, 함께 그의 죽음을 슬퍼했던 친구들 중 누구는 소식을 끊었고 또 누구는 정치판을 전전하고 또 누구는 아이들을 가르치고 또 누구는 중소기업의 사장이 되어 살고 있다. 오랜만에 모두가 다시 모였다. 첫 번째 약속 장소는 예전의 대학 근처였지만 두 번째는 자연스럽게 김광석 거리가 있는 대구의 방천시장이었다.
도심을 따라 흐르는 신천의 강둑에 그려진 그의 추억들은 우리의 이야기였다. 소외되고 가지지 못한 사람들, 그들과 함께하는 세상을 꿈꾸었던 젊은 날, 우리는 그가 마치 우리가 이루지 못한 세상을 노래하는 것처럼 느꼈다. 그래서 그의 죽음이 그토록 서러웠는지도 모른다. 해서 그의 죽음은 김광석 개인의 죽음이 아니라 우리의 꿈이, 우리의 청춘이 사라진 것이었는지 몰랐다. 모두들 그의 얼굴이 그려진 신천을 따라 걸으며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그가 부른 노래 속에 나오는 사람들의 이야기가 그 신천변에 묻어 있었다.
낡은 손수레와 폐지를 묶은 짐자전거, 밤늦도록 주인을 기다리는 빨래가 바람에 날리고 있었다. 우리는 긴 시간의 터널을 막 빠져나온 듯한 얼굴로 그의 이름을 내건 음식점에 앉았다. 아무도 김광석을 이야기하지 않았다. 옆자리에서는 또래의 사내들이 그가 타살되었다는 화제로 목소리를 높였지만 우리들 중 그 어느 누구도 이의를 제기하거나 문제를 삼지 않았다. 이제 와서 그것이 어떤 죽음이었는지를 따지기에는 우리는 이미 모두 지쳐 있었다. 아니 어쩌면 우리는 지금의 그 문제 제기가 가져올 파장이 발달장애를 앓고 있다는 그의 딸 서연에게 어떤 영향을 미칠까를 두려워하고 있는지 몰랐다. 그렇게 우리는 가족이라는 이름 앞에 이미 분노를 잃어가고 있었다. 설령 그 분노가 정당한 것일지라도 세상과 싸우는 법보다는 세상과 타협하는 법에 익숙해진 나이가 되어 버린 탓인지도 몰랐다. 술집 한 구석에서 누군가 취한 목소리로 낡은 스피커에서 흘러나오는 그의 노래를 따라 부르기 시작했다.
파란 하늘이 유난히 맑아서/ 좁은 새장을 풀려난 새처럼 모두/ 낡은 기억은 이제는 몰아내고 싶어/ 잦은 슬픔은 이제는 모두 안녕/ 창백한 거리를 달려가고 싶어/ 묻어나지 않는 가슴속 말은 가득해도/ 어둔 조명에 얼굴을 적셔 두고서/ 아무 말도 하지 않던 나의 친구여/ 잦은 슬픔은 이제는 모두 안녕/ 흐르는 시간에 씻긴 탓인지/ 퇴색한 추억은 너무 지쳐/ 파란 하늘 위로 날아가 버린/ 새들의 노랫소리를 듣고서/ 자유롭다며 부러워하던 친구여/ 비가 내린 여름날 하늘에/ 드높게 걸친 무지개를 보며/ 부르던 함성은 전깃줄 위에 윙윙거리네.
그의 노래 '새장 속의 친구'였다.
평소에 술을 입에 대지 않던 친구도, 언제나 말이 없던 친구도, 모임 때면 세상에 대한 분노를 감추지 못하던 친구도 모두 엉망이 되도록 취하고 있었다.
“난 이해해.”
두 아이를 키우며 가장이란 책임감 때문에 세상을 잊을 수 밖엔 없었노라고 긴 한숨을 쉬던 친구가 불쑥 말을 내뱉었다.
“사랑이란 것은 없어, 그건 현실 앞에서는 아무런 쓸모가 없는 것이야. 얄팍한 도덕 따윈 더 우스운 것이야. 그건 아이들에게 못난 아버지가 어떤 모습인지 보여주는 증거에 불과하다고.”
그의 말에 줄지어있던 소주 병이 소리를 내며 쓰러졌다. 하지만 아무도 그 병을 세우지 않았다. 방천시장의 밤은 그저 그렇게 깊어가고 있었다. 취한 바람이 그날처럼 전깃줄을 세차게 흔들고 있었다. 가슴이 먹먹한 하루, 그의 이름은 김광석이었다. 아니 그의 이름은 80년대였고 또 그의 이름은 우리들이었다.
덧붙임
컴퓨터의 파일을 정리하다가 찾은 오래 전에 썼던 글입니다.
자꾸 나이를 먹어가면서 체념과 후회가 부끄러움이 됩니다.
어제 아내와 함께 어머님이 돌아가시고 예순 다섯이 되면 모든 것을 정리하고 세계 일주 배낭 여행을 떠나자고 약속했습니다.
젊은 날, 그 무엇도 두렵지 않았던 순간, 눈물로 연민의 밤을 지새우던 그 날로 돌아가고 싶습니다.
통만두님의 댓글

감정노동자님의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