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금요일 새벽 어머님께서 영면하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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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주 목요일 오전 중환자실에서 어머님을 뵙고 나올 때, 가쁜 숨을 몰아쉬시며 마지막 말씀을 하셨습니다.
"운전 조심해라. 감기 조심하고"
그랬습니다. 제 삶의 굴곡의 고비마다 어리석게도 저는 어머님을 떠올리고 변명을 했습니다.
1984년 졸업을 앞두고 학생운동에 투신하려고 할 때에도, 스물여섯에 어린 자식 셋을 안고 홀로 되신 어머니께서 살아오신 길을 생각하면서 망설였지만 결국 어머니의 삶도 어렵고 힘든 사람들의 삶이라는 자기 변명으로 선택했습니다.
구속이 되고 1년이 넘도록 징역살이를 한 후 만기 출소를 하는 날, 어머니는 서둘러 고향가는 기차에 오르셨고 아들이 다시 집을 떠날 것을 염려하셨지만 결국 한달 남짓 후에 노동자의 길을 걷기 위해 집을 떠나는 아들에게 여비를 건네주셨습니다.
우여곡절 끝에 시민단체의 일을 하다가 90년대 초 운동권의 분열로 다시 택시운전과, 아파트 공사장의 용접공으로 그리고 농산물 중개인으로 일을 할 때에도 어머니는 단 한번도 못난 아들을 책망하지 않으셨지요.
어쩌면 어머니는 저에게 짐인 듯 생각되었지만 사실은 어머니에게 못난 아들이 짐이었던 걸 깨닫는 데에는 그리 시간이 걸리지 않았습니다.
파킨슨병과 피해망상증에 사시던 집을 무덤처럼 만드시고 계시는 어머니를 보는 것은 고통스러운 일이었습니다.
결국 젊은 날의 그 뜨겁고 순수했던 시간을 변절이라는 굴곡의 시간을 가지게 된 변명으로 어머니를 팔았는지도 모릅니다.
돈을 벌어야 했고 어머니를 보살피지 않으면 그 어떠한 대의도 소용없는 것이라는 자괴감에 시달렸습니다.
하지만 그것조차도 쉽지 않았습니다.
비록 생활의 순간은 조금 더 편해졌을지라도 경계인으로 살아가는 것은 너무도 힘이 들었습니다.
고통의 시간이었습니다. 하지만 이 고통의 시간을 누구에게도 발설하거나 티를 낼 수는 없었습니다.
힘이 들 때마다 세상을 떠돌았습니다.
인도에서 히말라야의 깊은 계곡에서 끝도 없는 죽음에 대한 유혹을 느꼈습니다.
라다크로 오르는 길에서 천길 낭떠러지 밑을 보면서 한발만 내딛는다면 이 고통의 연을 끊을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한 적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길 잃은 새끼를 찾는 어미 양의 울음소리를 듣고서 번뜩 정신이 들었습니다.
어머님이 돌아가실 때까지는 먼저 죽으면 안된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리고 15년 남짓 어머님 병환을 치료하면서 어머님께 용서를 빌고 또 빌었습니다.
단 한 번도 저를 탓하지 않으시고 제가 그 어떠한 일을 하더라고 그냥 뒤에서 보고만 계셨던 어머니는 너무도 작고 작은 몸으로 세상을 떠나셨습니다.
평생을 사람들에게 폐를 끼치지 않고 살아오신 어머님의 뜻에 따라 무빈소 장례로 어머님의 마지막 길을 가족들과 함께 했습니다.
외손자 외손녀들, 그리고 외증손자, 외증손녀를 비롯해 16명의 가족들이 함께 장례식에서 어머니는 행복하게 눈을 감으셨고 양산의 하늘공원 봉안당에 모셨습니다.
이틀 전 사망신고서를 제출하면서 이제 조금씩 어머님의 흔적을 지우면서 가슴이 다시 찢어집니다.
너무 오랜 시간 병마와 싸워오신 탓에 그야말로 옷 한가지 제대로 남기시지 않으셨고 병원 생활 입으셨던 환자복과 작은 시트 한장이 전부이신 것을 보니 너무 마음이 아픕니다.
징역을 사는 동안 면회가 끝나면 일을 나가시기 위해 매번 첫 번째로 면회를 오셨고 돌아가시는 순간까지 못난 아들의 걱정으로 눈을 제대로 감지 못하셨던 어머님께 용서를 빌고 또 빕니다.
무빈소 가족 장례라 어머님을 위해 기도해주신 지인들과 그 동안 어머님의 건강을 염려해주신 모든 분들께 깊은 감사를 드립니다.
고맙습니다.
롱숏님의 댓글

고인의 명복을 빌며, 랑탕님의 마음에도 치유와 회복이 있으시기를 기원합니다.
0xC0FFEE님의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