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거의 제왕 이해찬
cleas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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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년 7월 2일 PM 04: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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벗님님의 글 "선거를 왜 져"에 달았던 덧글인데

모처럼 장문을 써 다시 올립니다.

https://damoang.net/free/6615785#c_661729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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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현대 80년사를 정당이라는 기준으로 바라본다면 진보-보수 양대 정당의 역사로 볼 수 있겠죠.

그 두 축의 한 쪽이 민주당인데.. 이해찬의 일생은 할아버지(정확히는 할머니의 남동생)인 고 이상철 국회부의장(구 민주당 3선 의원) 으로부터 이어진, 그야말로 민주당 70년사의 정통성과 정체성 그 자체였습니다.

특히나 87년 평민당은 그 계통과 정통성이 현재의 민주당에게 바로 이어지고 있다는 점을 생각해 보면 민주당의 역사가 곧 이해찬의 정치 여정이자 선택의 여정과 동치 관계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겁니다.

내년이면 지금의 87년체제(6공화국)도 40주년을 맞이하게 됩니다. 이쯤되면 대한민국 현대 정치사를 87년을 기준으로 양분해서 설명할 수 있을 것인데, 전반부 40년을 대표하는 인물이 박정희라면 87이후 40년을 관통하여 대표하는 인물은 이해찬 이었다 생각합니다.

저는 이렇게 한국 현대사라는 시공간을 무대로 70년에 걸쳐 창업과 투쟁, 재창업, 수권, 확장을 통해 대한민국의 한 축을 담당해 온 그 '민주당' 의 긴 서사를, 흥미 요소를 가미해 동양 특유의 '왕조'라는 틀을 빌려 바라본다면, 이해찬이라는 인물은 초한지 한3걸(한신, 장량, 소하)을 한 인물안에 다 감당한 그런 케이스 아니었나 하고 생각합니다.

즉, 본인의 7선과 6월 항쟁, 민주당의 크고 작은 전국단위 전투와 전쟁(선거)을 승리로 이끈 장군의 면모에서 한신을 보고,

재야 시절부터 이름을 날렸던 전략가의 면모와 각종 전설들, 40년에 걸쳐 4명의 민주당 대통령, 무너진 민주당 재건, 180석 여당을 이뤄 내고야 말았던, 비교 대상이 없는 그의 정치적 심모원려의 결과물들 앞에서는 장량을 떠올리며,

이해찬이 손대면 해결한다 해서 당내에서 '마이다스의 손'이라고 불렀을 정도로 뛰어난 개인적 자질을 기반으로, 부시장으로, 장관으로, 총리로, 당대표로서 민주당 정부의 실력과 책임이라는 것이 어떤 것인지를 보여준 행정가의 면모에서는 소하를 소환하게 됩니다.

(소하의 면모가 강조되어 제가 본 추도 메시지 중 고인의 실체에 제일 닿아있다고 느낀 평가가 권영길 원로의 메시지입니다.

"이해찬 전 총리는 민주화를 실현시킨 전략가이면서
민주화가 실현이 되면은, 국민의 삶의 질이 나아진다는 것을 실증하기 위한 정책을 입안하고 실현시킨,
실사구시의 최대의 정책가 그리고 최고의 행정가.

전략과 정책과 행정, 이 세가지를 다 겸비한 분이 이해찬 총리이고 아마 이해찬 총리를 빼고 나서는 그런 분을 찾을 수가 없죠' (권영길 전 민노당 대표))

써 주신 글에서 이런 이해찬의 여러 면모 중 선거에 주목을 해 주셨는데, 사실 이해찬의 선거 승리 이력은 그 내용을 보면 더 불가사의한 대단함이 발견됩니다.

먼저 이해찬을 수식하는 데 가장 먼저 따라붙는게 4번의 킹메이킹 이력일 겁니다. 우리나라는 보수 언론의 생리에서 이어져 온 것인지 모르겠지만 정치인의 유형 중 소위 '킹메이커'에 집착하고 높이 쳐주는 문화가 이어져 왔는데.. 어쨌든 이해찬은 그 킹메이킹의 성과로는 그야말로 전무후무한 인물임에는 두말할 나위가 없을 겁니다. 역대 킹메이커로 이름을 오르내렸던 정치인들이 과거의 김윤환, 윤여준, 김종인 등등이 있는데 실상 윤여준은 이회창을 대통령 만드는데 실패했었고 김종인은 그야말로 청부 킹메이커를 자임하다시피한 행적이었지만 박근혜 때 말고는 성공한 게 아니었죠. 더군다나 이해찬의 킹메이킹은 나머지 세 명 같은 정치공학자로서의 면모가 중심이 된다기보단 민주당인으로서의 신념을 이루기 위해 능력을 쏟아부은 것의 결과물이기에 횟수 외에도 비교 선상에 놓는 게 부적절하다고 봅니다.

더군다나 이해찬이 선택한 4명의 대통령들은.. 이해찬이 그들을 선택했던 시기에 4명 모두 진영 내에서 언더독이었다는 공통점이 있습니다. 이해찬이 87년 6월 항쟁 후 비판적 지지 입장을 통해 김대중을 선택했을 당시 김대중은 온갖 종류의 비토로 둘러 쌓인 소외된 지역 호남 기반의 야당 정치인이었고, 노무현은 호남이 주류인 민주당에서 영남 출신에 낙선 횟수가 더 많은 정치 이력으로 이인제 대세론을 뚫어내야 했던 소장파 정치인일 뿐이었습니다. 문재인은 노무현 정권은 실패 했다는 평가를 배경으로 영패, 친노 패권, 친문 패권 등의 프레임을 뚫어내는 방식으로 노무현의 정치를 구현해내야 했던 정치 신인이었습니다. 이재명 지사 같은 경우는 뭐 굳이 말씀을 드리지 않아도 되겠구요.

이해찬은 민주당과 대한민국의 미래를 위해, 그리고 본인의 신념을 투영할 민주당의 다음 인물들로 그런 언더독들을 선택한 것이고, 결국 대통령으로 만들어 냈죠. 이해찬 킹메이킹의 특징이라 할 것입니다. 그저 대세 추종하고 줄 잘서서 대통령들의 편에 서게 된 게 아니라 자신이 먼저 필요한 인물을 알아보고 뜻을 같이 해 대통령으로 만들어 낸겁니다.

회고록을 읽다보면 민주당의 한신이자 장량으로 그가 치러낸 숱한 선거를 복기하다 보면 위에 말한 것 말고도 어이없는 특징이 하나 더 발견됩니다.

그건 이해찬이 치른 주요 전국 단위 민주당 선거들 중 상당수가 당의 지원을 받지 못하고 당 외곽에서 반독립적으로 캠프를 꾸려 치른 선거였다는 점입니다.

먼저 95년 조순 서울시장 선거 같은 경우 당시 정계 은퇴 상태의 DJ가 정계복귀의 전초작업 격으로 조순을 영입해 치른 선거였는데, 당시 민주당의 당대표는 이기택 이었고 DJ가 들이민 후보를 당연히 당차원에서 지원하지 않았습니다. 그걸 탁월하고 새로운 선거 기획으로 대역전승을 펼쳐낸거죠.

97년 DJ 대선 같은 경우는 DJ 정계 복귀 이후 기존 이기택 민주당 체제로는 어려워 대선용으로 국민회의를 분리 창당하고 치른 대선이라 역시나 진영 전체의 힘으로 치러낸 선거는 아니었습니다.

2002년 때는 당시 대선 경선에서 낙마한 한화갑 대표가 노무현 민주당 후보를 지원하지 않아 노사모와 역시나 별동대 성격의 선대위로 선거를 끌어간 과정이 회고록에 나옵니다.

2010년 지선은 민주당 서울 시장 후보로 한명숙 전 총리가 나섭니다. 당시 이해찬은 MB에 정권을 내주고 민주당을 탈당한 원외 인사로 민주당 재건을 위한 씽크탱크 활동, 민주진영 조정자 역할 등을 하던 시절이었습니다. 민주당은 한명숙 후보를 민주당 후보라기 보단 친노 후보로 생각하고 당 지원이 없어 당시 이해찬 총리가 이끌던 친노 단체인 '시민주권' 주도로 선거를 치렀는데 당시 이해찬 총리가 자신의 집을 담보로 잡히고 3억원을 대출해 선거를 치른 이야기가 나옵니다. 결과는 이기는 줄 알았던 선거가 새벽 강남 개표로 2만 5천표차 역전패를 당하는 것으로 아쉽게 끝납니다. 이해찬이 당지원없이 선거를 치렀다 진 사례인데 당시의 여러 여건을 생각한다면 실패로만 볼 건 아니었다 봅니다.

그리고 그 때 당선된 오세훈은 무상급식 문제로 자진사퇴하고 보궐이 열리게 됩니다.

이 때 국토대장정 중이던 박원순이 이해찬에 연락하여 자신의 서울시장 출마를 타진합니다. 당시 이해찬은 탈당한 원외 인사였지만 무상급식 어젠다를 탄생시키게 된 김상곤 교육감 선거를 돕는 등 진영의 조정자로서 역할을 인정받고 있었습니다.

이해찬은 박원순이 서울시장이 되기까지 출마, 민주당과의 시민 경선 등에서 조정자로서의 역량을 십분 발휘하였고 박원순의 선거 과정을 도와 서울시장을 만들어 냅니다. 또한번 민주당 밖에서 선거를 치러 승리를 일궈 낸거죠.

(이해찬은 무소속 박원순을 시장으로 만들어 내면서 그를 계기로 당 밖에선 혁신과 통합을 만들어 진영 통합 작업을 추진하고 이를 바탕으로 민주당과 합당을 이루어 내서 마침내 몰락했던 민주당의 재건을 이뤄 냅니다. 물론 진정한 재건은 15년 더불어민주당의 창까지 밀렸다고 봐야하긴 하지만요.)

이런 이해찬 선거 승리의 특징은 16년 자신의 세종시 무소속 출마에서 다시 한 번 발현이 됩니다.

김종인의 '정무적 판단'으로 공천에서 탈락을 하게 되자 무소속으로 출마해 선거를 치르고 당선이 된 거죠. 당시 세종시 민주당원들이 대거 탈당해 무소속 후보의 선거운동원으로 뛰었습니다. 사실 4년전 비록 민주당적을 달고 뛰긴 했지만 한명숙 대표의 부탁으로 지역구를 바꿔 혈혈단신 세종시에 입성해 6선을 이뤄 낸 것도 역시나 같은 특징 선상에서 바라볼 수 있는 선거였습니다.

저는 회고록에서 이런 이해찬 선거의 특징을 발견하면서 대체 비결이 뭘까? 하고 생각해 보게 되었는데.. 뭐 워낙에 뛰어난 자질과 자세를 지닌 분이었다는 것 말고는 달리 생각되는게 없더군요.

그도 그럴게 이해찬이라는 인물이 정당 활동을 계파나 조직 기반으로 한 것도 아니고, 또 항상 과학적이고 냉철한 상황 판단을 중시하긴 했지만 그를 오랜 세월 겪어본 원로들이 이구동성으로 평가하듯이 그는 원칙에 충실한 정치가였지 정치공학적인 행보를 구사하거나 술수에 능한 유형과는 또 거리가 멀었으니까요.

오랜 재야 시절 활동을 통해 민주당 진영의 한 축인 시민사회의 신뢰를 얻은 인물이었다는 점을 무시할 순 없지만 그들의 지원과 신뢰라는 것도 사실 상징적인 것이 크고 어떤 실질적인 영향력을 끼쳤다고 보기엔 그의 정치인 세월이 너무 길죠.

여하튼 선거라는 키워드 하나만을 놓고 봤을 때도 이해찬은 전무후무한 인물이었습니다만...그 선거의 제왕이라는 이력 조차도 그의 원칙을 저버리지 않은 바른 정치인으로서의 자세가 보여줬던 정치 이력에는 그 빛이 모자란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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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은 30대 젊은 시절 이해찬 청년의 모습들인데 가져와 봤습니다.

Screenshot_20260630_211914_NAVER.jpgScreenshot_20260630_211713_NAVER.jpgScreenshot_20260630_211537_NAVER.jpg

댓글 (2)

  • 집사C

    집사C Lv.1

    07.02 · 175.♡.236.121

    아 글을 읽고 있자니 책장에 있는 회고록에게 미안해집니다.

    저녁 먹고 첫 장부터 넘겨 봐야겠어요.

    그나저나 벌써 그리워지네요.

  • Bigwrigglewriggle

    Bigwrigglewriggle Lv.1

    07.02 · 106.♡.66.127

    그냥 똑똑한 사람입니다. 그런데 글 중간에 있듯 정무적 판단으로 공천 취소 하는 경우 지금 민주당에서 고 이해찬 의원처럼 하면 복당 불가에 가깝습니다. 당규상에 공천 볼복자는 10년 선거 입후보 제한하고 있어서요. 정치인생 끝납니다. 아무튼 고 이해찬 의원 당선되서 복당할때 금의환향 했죠. 이후는 아시다시피 추미애 당대표 이후 당대표 선거에 나와서 송영길을 가볍게 부셔버리고 당대표가 되었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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