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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딩크 관상 리포트에 대한 변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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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블루캣 39.♡.24.164
작성일 2024.06.11 10:17
735 조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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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저께 메리츠증권의 관상 리포트가 무척 흥했지요. 리포트 내용이 텔레그램으로 돌 때 여의도 사람들끼리는 살짝 웃고 넘어갔는데 커뮤로 전파되면서 엄청난 조롱을 받고 있는 모양입니다. (솔직히 조롱 당해 마땅한 수준의 글이었다고 생각합니다..) 왜 이런 리포트가 나오게 됐는지 전직 애널의 입장에서 해명(?)해 보고자 합니다.  


1) 애널리스트 리포트의 무게감 약화

7~8년 전까지만 해도 주식시장 정보의 중심은 단연 애널리스트였습니다. 보고서가 나와야 믿을 수 있는 기업이라는 인식이 강했던 시기이니 기업 IR도 애널리스트를 위주로 이뤄졌었습니다. 리포트 자체도 그 산업에 익숙한 사람들만 알아먹을 수 있는 용어들이 가득했었죠. 

그런데 삼프로TV가 흥하면서 이런 기조에 금이 가기 시작합니다. 다양한 분야의 전문가들이 업계의 깊숙한 얘기들을 직접 전해주니 더이상 애널들의 말을 귀담아 들어줄 필요가 없어진거죠. 여기에 일부 스타 애널들까지 삼프로에 출연해서 친절하게 업황을 설명해주니 일반 투자자가 굳이 어려운 리포트를 읽어볼 필요가 없어졌습니다.

그래서 최근에는 리포트에서조차 정보전달의 비중이 낮아지고 내용이 말랑말랑해지는 경향이 강화되는 것 같습니다. 


2) 애널리스트 세대교체와 인터넷 밈의 적극적인 활용

리서치센터가 비용 부서로 인식되면서 지난 수년간 시니어 애널들이 물러나고 주니어들이 그 자리를 채우는 비자발적인 세대교체가 이뤄졌습니다. 지금은 30대 초중반 정도가 이 업계의 주력세대일 것 같습니다. 

이들의 특징이 각종 인터넷 밈에 익숙하다는 것이고, 펀드매니저 연령대도 함께 어려지니 자연스럽게 리포트에 드립을 섞는 기조가 강화되었습니다. 

제가 데뷔할 무렵에 센터장님께서 “제목이 리포트의 반이다. 못 쓴 리포트보다 더 나쁜 건 고객이 읽지 않는 리포트다”라는 말을 해 주신 적이 있습니다. 최근 들어 리포트에 각종 개드립들이 난무하는 것 또한 고객들에게 자기 리포트를 어필하려는 노력의 일환으로 이해하시면 될 것 같습니다. 

다만 처음엔 저도 이런 드립들을 재미있게 봐줬었는데 이게 요즘들어 선을 넘는 경향을 보이는 듯 해서 우려가 되기는 합니다. 


3) 리포트 퀄리티 체크를 하는 선임들의 부재

과거 애널리스트 업계는 철저한 장인-도제 방식으로 돌아갔습니다. RA로 들어와서 3년 넘게 데뷔도 못 하고 모닝미팅 자료나 만들고 수익추정 모델 수기입력이나 하는 경우가 매우 흔했습니다.

데뷔도 무척 어려웠던 게, 몇 달 걸려 초안을 써서 갖고 가면 사수한테 빠꾸 먹고, 팀장한테 빠꾸 먹고, 센터장한테 빠꾸 먹고 하면서 고치고 또 고치는 과정을 거듭하곤 했습니다.

그렇게 리포트를 완성하면 마지막으로 전 시니어들 앞에서 발표를 하고 질의를 받는 디펜스 과정을 거쳐야 정식 데뷔를 할 수 있었죠. 데뷔 이후에도 최소 2~3년 정도는 사수들의 검사를 맡아야 리포트 발간이 가능했습니다. 

요즘은 이런 절차가 많이 생략된 것으로 압니다. QC를 불필요한 시어머니 짓으로 여기는 주니어들이 많은 데다(저도 데뷔 시절에는 그렇게 생각했습니다만…) 시니어들도 자기 먹고 살기 바쁜데 굳이 이런저런 말 들어가면서 리포트 고쳐주는 일을 하려고 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 결과 기본적인 퀄리티 체크가 이뤄지지 않은 리포트가 시장에 횡행하게 되었습니다. 문제의 관상 리포트 역시 시니어들의 QC를 받지 않고 발간이 됐을 거라고 봅니다. 해당 애널이 워낙 드립을 많이 치는 스타일이긴 한데, 아무리 그래도 팀장, 센터장이 나중에라도 QC를 봐 주지 않았다는 건 이해가 잘 안 가는 일이긴 합니다. 


가뜩이나 애널리스트의 위상이 낮아지는 마당에 이런 욕먹어 마땅한 일들이 생기니 전직 애널 입장에서 안타까운 마음이 큽니다. 이렇게 조롱받다 사라져 갈 수도 있겠구나 하는 생각도 들구요. 

애널이라는 게 회사가 아닌 시장과 소통하며 자율적으로 일할 수 있는 정말 매력적인 직무인데, 지금이라도 후배들이 분발해서 이 직업을 잘 지켜주면 좋겠습니다. 

블루캣 Exp 13,0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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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6 / 1 페이지

Dave님의 댓글

작성자 no_profile Dave (122.♡.178.138)
작성일 06.11 10:42
리포트를 활용해 자기 귀중한 자산을 투자를 하게 되는데..정말.이런식의 리포트가 나온다면 그 누구도 신뢰하지 않겠죠...

블루캣님의 댓글의 댓글

대댓글 작성자 블루캣 (39.♡.24.164)
작성일 06.11 10:53
@Dave님에게 답글 애널도 사람이니 당연히 실수는 합니다. 근데 그 실수를 봐 줄 사람이 하우스에 하나도 없었다는 게 이해가 안 되는 지점이지요.

나지금너무신나님의 댓글

작성자 no_profile 나지금너무신나 (116.♡.153.205)
작성일 06.11 11:11
전직 애널리스트님 반갑습니다! 한참 옛날이긴 하지만 저도 전직 애널리스트입니다 ㅋㅋ

블루캣님의 댓글의 댓글

대댓글 작성자 블루캣 (39.♡.47.48)
작성일 06.11 12:30
@나지금너무신나님에게 답글 반갑습니다. 업계 선배시군요. 저는 관둔 지 얼마 안 돼서 아직 애널 뽕이 남아 있는 상태입니다. ㅎㅎ

ppoilove님의 댓글

작성자 ppoilove (223.♡.7.229)
작성일 06.11 11:38
안타깝지만 결국 향후 사라질 직업이라고 생각합니다. AI의 발전을 지켜보면서, 이제는 이런 리포트는 필요하면 알아서 기초적인 것 정도는 스스로 AI를 거쳐서 만들어 쓰는 시대가 온데다, 이미 품질면에서 저렇게 열화되는 꼴을 스스로 자처하는 걸 보면 이제 수명이 거의 끝났다고 봐도 과언이 아니라고 봅니다.

블루캣님의 댓글의 댓글

대댓글 작성자 블루캣 (39.♡.47.48)
작성일 06.11 12:38
@ppoilove님에게 답글 AI 리포트라고 나오는 것들이 아직까지는 IR 자료 짜깁기 하는 수준이지요. (그나마도 RA들 손을 좀 타야 그럴 듯한 수준으로 나온다고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애널리스트 영역 중 수익추정 모델을 만들고 관리하는 건 AI로 해결하기 매우 어려워 보입니다. 최근 리포트의 질적수준 저하는 저도 동의하는 바지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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