낙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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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엽이 떨어지는 계절이다.
우리 집 앞에는 아주 커다란 나무 세 그루가 있다. 나무가 커서 이파리도 많다. 이 많은 것들이 이제부터 한 달 동안 앞 마당에 떨어져 쌓인다. 쌓여 있는 낙엽을 치우는 일은 꽤 귀찮은 일이지만 떨어지는 낙엽을 집안에서 창문을 통해 구경하는 것은 평온하고 즐거운 일이다. 어쩌면 인간 유전자에 불멍하는 것이 즐거운 일로 각인되어 있듯이 낙엽을 감상하는 일 또한 그렇게 유전자에 각인되어 있는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도 해본다.
앞마당에 쌓인 낙엽을 열심히 치워 봤자 어차피 한 달 동안 줄기차게 떨어져 쌓일 것이기 때문에 나는 낙엽이 수북하게 쌓여 앞마당을 코팅하듯 혹은 낙엽으로 된 이불을 깔아 놓은 듯 낙엽이 쌓일 때까지 그냥 둔다. 잘 나가지 않는 앞마당이지만 (춥다) 가끔 나가서 낙엽을 밟아 보기도 한다. 기분이 썩 괜찮다.
그렇게 한참을 낙엽을 모았다가 (모았다는 표현이 적당하다) 이제 낙엽을 치우기로 결심하고 앞마당에 나간다. 그러면 딸래미가 따라 나와서 낙엽을 던지고 논다. 이때 나는 딸래미 사진을 찍는다. 앞으로 얼마나 더 이렇게 놀아주고 사진 찍혀 줄지 장담할 수 없지만 딸래미가 순순히 사진 찍혀 주는 한 열심히 많이 찍으려고 한다. 그래서 일부러 낙엽을 좀 모았다가 치우는 걸지도 모른다. 낙엽 던지고 노는 딸래미 사진 찍고 싶어서.
그러다가 어느 날, 낙엽이 쌓여 있어도 딸래미가 놀러 나오지 않는 날이 오면 나는 좀 쓸쓸해질 지도 모른다. 어쩌면 낙엽을 모았다가 치우지 않고 그냥 주말에 바로 바로 치울지도 모른다.
그러고 보니 '떨어지는 낙엽'이라는 표현은 역전앞 같은 동어 반복이네. 그렇다고 한들 어떠하리. 그냥 낙엽이라고 쓰는 것보다 떨어지는 낙엽이라고 해야 내가 지금 이 글을 쓰면서 바라보고 있는 저 모습에 대한 느낌이 더 잘 다가오는 것 같은 걸.
올해도 약간 불안하니 미리 딸래미한테 확답을 받아 놓아야 겠다. 다음 주말에 낙엽 치울껀데 그 때 나가서 같이 낙엽 던지고 놀을래? 하고.
벗님님의 댓글
어느 날이었다.
해가 기울어 그림자가 길게 드리우던 오후, 공원의 벤치에 앉은 한 할아버지가 눈에 들어왔다.
몇 번이고 스쳐 지나쳤던 그 자리였다.
그러나 이번에는 달랐다.
낙엽이 바람에 밀려 흩날리는 그곳에 그는 여전히 앉아 있었다.
지팡이를 손에 꼭 쥐고, 세월이 깃든 듯 두툼한 외투를 걸친 그의 모습은
마치 오래된 나무처럼 그 자리를 지키고 있는 듯했다.
그의 눈길이 머무는 곳은 잔잔히 내려앉는 낙엽이었다.
무슨 사연이 있으리라. 그런 생각이 마음속에서 파문처럼 번졌다.
나는 잠시 망설였다.
익숙하지 않은 사람에게 말을 건다는 것은 어떤 용기가 필요했다.
그러나 할아버지의 뒷모습에서 느껴지는 고독이 나를 움직였다.
천천히 다가가 벤치에 앉았다.
"안녕하세요,"
가볍게 인사를 건넸다. 그는 느리게 고개를 돌려 나를 바라보았다.
그의 눈빛에는 깊은 연륜이 스며 있었지만, 그 안에는 어딘가 허공을 헤매는 느낌이 있었다.
“무엇을 기다리세요?”
용기를 내 물었다. 그러자 그는 느릿느릿 대답했다.
“여인을 기다리고 있어요. 오늘 만나기로 했거든요.
만나면 같이 커피숍에 갈 겁니다. 오늘은 조금 늦는 것 같네요.”
그의 목소리는 온화했지만 어딘가 멀리 떠 있는 듯했다.
그의 말 속에는 자신만의 시간이 흐르고 있는 듯했다.
나는 그 순간, 그의 시간이 우리와 다르게 흐르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는 여전히 자신의 젊음을 기억 속에 품고 있었다.
그 여인도 그의 마음속에선 아마 찬란히 젊었을 것이다.
그러나 현실은 달랐다.
며칠 동안 할아버지를 유심히 지켜보았지만, 그가 기다리는 그 여인은 끝내 나타나지 않았다.
“어쩌면...”
생각이 잠시 머물렀다.
어쩌면 그는 이미 먼 곳으로 떠나버린 여인을 기다리고 있는지도 모른다.
마음 한구석이 알 수 없는 슬픔으로 차올랐다.
과거 속에 머물러 있는 그의 모습이 애틋하기도 하고 안타깝기도 했다.
그날도 그는 벤치에 앉아 있었다.
나는 따뜻한 커피 한 잔을 들고 조심스레 다가갔다.
“이거 드셔 보세요. 오늘은 조금 쌀쌀하네요,” 라며 커피를 건넸다.
그는 미소 지으며 받았다.
손끝에 닿는 온기를 느끼며 그는 고맙다고 말했다.
나는 그 옆에 조용히 앉아 그의 시선이 머무는 곳을 바라보았다.
바람에 흩날리는 낙엽들, 그들의 마지막 춤이 눈앞에서 펼쳐지고 있었다.
말은 없었다. 대신 그 순간의 공기가 모든 것을 말했다.
낙엽이 땅으로 내려앉듯, 우리의 침묵도 서로의 마음속으로 스며들었다.
나는 문득, 어쩌면 그가 잃어버린 시간을
벤치 위에서 찾으려 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가 기다리는 여인은 그와 함께했던 모든 기억일지도 모른다.
그의 눈에는 멀어진 시간들이 낙엽처럼 한 장 한 장 떠올라 내려앉고 있는 듯했다.
“오늘도 만나실 수 있을 거예요,”
나는 그에게 말했다.
그가 누구를 기다리고 있는지,
그리고 그 만남이 어떤 형태일지는 알 수 없었지만,
그가 품고 있는 기다림이 얼마나 소중한 것인지 느낄 수 있었다.
그와 함께 앉아 있는 시간 동안, 내 마음속에도 잔잔한 파문이 일었다.
지금의 나도 언젠가 그처럼 어떤 기다림을 품고 살아갈까.
그 기다림의 끝에서 나도 누군가를 그리워하며 이렇게 벤치에 앉아 있지 않을까.
그렇게 우리는 말없이, 떨어지는 낙엽을 바라보며 가을의 끝자락에 스며들었다.
잘 쓰셨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