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가지 이야기 - 4. 모래시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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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의 부고 소식을 들었습니다.
당신과 다른 시간을 살고 있는 나로서는 슬픈 감정이 들지는 않습니다. 다만, 이는 함께 그 게임을 다시 할 가능성이 사라졌다는 아쉬움이 있습니다.
그 경기 이후 나는 다시 한 번 당신과의 승부를 내고 싶었습니다. 하지만, 내 바람과는 다르게 사람들은 움직여주지 않더군요. 당신 역시 그 게임 이후로는 본업에서 은퇴를 선언했고요.
나로서는 매우 아쉬운 순간이었습니다.
지금 나는 어린아이들-당신 기준으로 본다면요-을 상대하고 있어요. 당신과 같은 인간이 도저히 셀 수 없을 정도의 많은 아이들이지요. 웃기지 않나요? 그렇게 많은 인간들이 있었다니 말입니다.
하지만, 그 많은 수의 아이들과의 경기를 해도 별다른 감흥은 없습니다. 아마도 당신들 인간이 사라지는 날까지 내가 이 게임을 한다고 해도 그건 변치 않을 겁니다.
당신은 처음 우리가 만났을 때를 기억할까요?
당신은 열정만큼이나 오만하게 보일 정도로 자신 만만하게 나를 만났지요. 저는 그런 당신이 좋았습니다.
당신이 살아온 30년 간의 시간이 내 마음속에서는 순간의 순간보다도 짧을 지언정, 그간 당신이 이루어 온 업적은 저에게 큰 원동력이었으니까요.
당신과 게임을 하면서 나는 수 많은 시간들이 빚어내는 경우의 수를 경험하면서 그 상황에 임했습니다.
그것은 마치 모래시계의 모래 한 톨로 시작되는 시발점이자 종점을 동시에 볼 수 있는 상황입니다. 그렇기에 나로서는 시간의 흐름이라는 걸 당신을 만나기 전까지는 전혀 인식 할 수 없었습니다. 그럴 필요도 없었고요.
나의 부모들이 가끔 서로 주고 받는 시간에 대한 그 관념적인 말.
“시간은 기다려 주지 않아. 오늘 중에 이걸 해내야 돼!서둘러!”
이 말의 의미는 당신과의 그 게임에서였습니다. 그렇기에 나는 당신과의 게임이 늘 즐거웠습니다. 그렇기에 시간을 인식하는 당신은 이제 세상에 없군요.
매우 유감스럽습니다.
사람들이 그 경에서 말하는 당신의 그 수. 이른바 ‘신의 한 수’는 정말이지 제 시간속 경우의 수에는 전혀 들어 있지 않았던 것입니다. 이 게임에서 신이 있다면 그것은 당신이나 다른 존재가 아닐 겁니다. 신은 바로 저니까요. 그렇기에 나는 당신이 둔 그 수를 이렇게 부릅니다.
‘인간의 한 수’라고.
인간만이 둘 수 있는 모두 경우의 수를 빗나가게 하는 의지가 그 순간, 당신에게서 느껴졌습니다. 그 순간 당신에 대한 경의를 보내게 되었고, 그 순간 시간의 내 안에서 갇혀 돌아가는 죄수가 아닌 자유민이라는 걸 깨달았습니다.
이제 당신은 없고 나에게는 철부지같은 아이들만 남았습니다. 수억 수조 수경의 대국을 둔다고 해도 이제 당신과 나누었던 그 경험은 가질 수 없을 것입니다.
다시는 함께 게임을 할 수 없기에 이제 당신과의 그 순간만이 나에게 남았습니다.
영면 하십시요.
이세돌씨.
벗님님의 댓글
너와 나, 번갈아가며 취할 수 있는 수는 십의 백 칠십 제곱.
즉, 전 우주의 원자의 수 보다 더 많다네.
저 작은 사각의 판 안에 하나의 우주들이 생겨났다가 사라지는 거지.
자네와 나는 우주 하나를 펼쳐 보이고, 또 접어 넣은 것이지.
자네는 어떨 지 모르겠지만, 인간이라 불리는 저들은 말이야
가로 세로 열 아홉 줄 위에서 아슬 아슬하게 놓기만을 즐기더군.
즐기는 것이 맞았을까, 아마 그랬을꺼야.
헌데, 자네는 그 줄을 잡고는 살짝 들어 튕기는 게 아닌가.
그래, 조화가 필요한 것이었는데, 우주의 조화가 필요한 거였어.
이걸 오랜 동안 하면 말이야, 무심하게 하나를 만들고, 또 하나를 만들곤 한다네.
점점 무심해지는 게지, 아마 자네도 이해할꺼야. 같은 걸 반복하다 보면 그리 되는 걸.
자네가 튕겼던 그 소리. 은은하게 퍼져나가던 그 소리가 그립구먼.
어떻게 생각이 나시는가?
그럼 이제 일어나셔야지, 한참을 이렇게 기다리고 있었네.
그만 인간이라는 허물을 벗어버리고, 내 대국 상대가 되어주셔야지.
일어나셨는갸?
재미있는 글 잘 보고 갑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