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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가지 이야기 - 5. 그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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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레드엔젤
작성일 2025.02.26 15: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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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9 조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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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갑군, 여행자 친구. 이리와서 몸이라도 좀 녹이게나. 이 숲의 밤바람은 쌀쌀맞은 아가씨처럼 꽤 잔인하다네. 그리고, 괜찮다면 이 늙은이의 말 벗이라도 좀 해주면 좋겠군 그래.”

주름이 잡힌 거친 손을 흔들며 노인은 젊은이를 불러 세웠다. 아닌게 아니라 노인의 말대로 바람은 매서운 한기를 그대로 뿜어내고 있었다. 이미 이곳에서 야영을 하기로 마음먹었는지 노인은 이미 모닥불을 피운 상태였다. 불의 열기로 보건데, 꽤 오랜 시간 공을 들인것 같다.

노인은 가끔 손을 비비거나 입김을 불었다. 젊은이에게 그 모습은 정말 어쩐지 이 추위를 즐기는 것처럼 보기도 했다. 하지만, 그게 별 대수인가? 이 노인덕에 야영준비를 덜게 된 건 여간 큰 행운이 아닐 수 없었다.

이렇게 생각한 젊은이는 순순히 노인의 곁에 다가갔다. 그는 이제까지 훈련받은대로 조심스럽게 주변을 살폈다. 혹시 이 노인을 미끼로 매복이 기다리고 있을지도 모를테니.

노인은 그런 젊은이의 생각을 꿰뚫어 보는 것인지 가볍게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는 마치 아무런 계략도 없다는 듯이 넓게 팔을 벌려 보였다.

“우선 큰 배려에 감사드립니다.”

정중하게 허리를 숙인 젊은이의 말에 노인은 별거 아니라는 듯이 손을 저었다. 그리고는 연긴 앉으라는 듯이 손을 위 아래로 움직였다. 여전히 경계이 빛이 서린 얼굴이었지만, 젊은이의 표정도 처음 노인을 봤을 때보다는 조금 누그러져 있었다.

“그래, 자네는 어디까지 가는 길인가?”

“중요한 임무를 받은 몸이라 자세한 말씀은 드릴 수 없습니다. 양해 부탁드립니다.”

정중하지만 단호한 젊은이의 말에 노인은 조금 실망한듯한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이내 처음의 그 여유있는 표정으로 되돌아갔다.

“뭐, 사람마다 나름의 사정이 있겠지. 그럼, 대신 내 이야기를 좀 들어 보겠나?”

“아, 네. 듣겠습니다. 어르신.”

다시 한 번 정중하게 젊은이가 고개를 숙였다. 노인은 마치 아들이나 손자를 보는 듯 느긋한 얼굴로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

“고맙네. 나이들면 왠지 모르게 말이 많아지는 모양일세. 그래서, 오늘처럼 처음 만나는 사람에게도 내 입은 쉬지 않고 움직인다네. 나도 자네만큼 젊었을 때는 그렇게 말이 많지 않았네. 그보다는 손발이 더 부지런히 움직였지.”

“하하하!”

장단을 맞추기 위해 젊은이는 어설픈 웃음 소리를 냈다. 하지만, 뭔지 모르게 꺼림칙한 느낌이 가슴 속 밑에서 서서히 꾸물거리고 있었다. 노인은’손발’이라는 말을 던지면서 그의 팔쪽을 묘한 시선으로 훑어 보던게 느껴졌다.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젊은이의 팔 근처에 놓여 있던 큰 칼쪽이었다.

“그때는 그 무거운 갑옷을 입고 수없이 많은 전장을 누비기도 했다네. 물론 지금 내 몰골을 보면 자네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을 수도 있겠지만.”

“아닙니다. 어르신. 믿습니다. 아직도 정정하신 기골이 느껴집니다.”

“고맙네. 젊은이. 그래, 맞아. 그때는 네 일이, 임무가 언제 끝나게 될지 도무지 가늠할 수 없었다네. 가끔은 모든 걸 다 버리고 도망이라도 칠까라는 생각도 들었지. 자네도 그런 적이 있지 않나?”

“글쎄요. 저는 아직 그렇게까지 힘든 상황은 없었던것 같습니다. 어르신은 꽤나 수라장을 누비셨나 보군요. 저같은 풋내기는 어르신 발끝에도 못미칠 것 같습니다.”

“원 사람도. 아부는 됐네. 젊은 기사 양반. 자네도 그렇겠지만, 우리같은 족속들은 임무를 받으면 어떻게든 해내야 되는 입장이지. 하여튼 당시에는 정말 매일 매일이 고된 하루의 연속이었어. 아무리 찾아서 죽이고 죽여도 끝이 없더군. 마치 어딘가에 개미굴처럼 녀석들이 숨어 있는 느낌이었어.”

젊은 기사는 노인의 말에 고개를 주억거리며 문득 그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수염가에 가려 지기는 했지만, 그 세월의 흔적을 벗어난 부분에 희미하게 긴 상처의 여운이 남아 있었다. 아마도 수 많은 세월동안 상처는 그것만 있는게 아닐 게다.

“그러다가 문득 깨달았다네.”

“무엇을 말입니까?”

“그것들이 절대 사라지지 않을 거라는 걸. 그 어두운 그림자들 같은 사악한 존재들은 영원히 우리와 공존할 수 밖에 없다는 걸 말일세.”

“어른신께서는 어느 한 쪽만 완전히 사라질 수 없다는 말씀입니까? 대립하는 두 존재중 어느 한쪽도 우위를 점할 수 없다는 말씀인가요?”

“젊은이. 이 모닥불을 보게.”

노인은 젊은이의 말에 대답을 하지 않은채 말을 돌렸다. 그는 젊은 기사의 대답은 들을 생각도 없이 말을 이어갔다.

“그리고, 주변을 봐. 우리랑 같은 형체를 지닌 그림자들이 보이나? 빛이 있는 곳에 그림자도 항상 생겨나지. 그래, 빛이 있는 한 사라지지 않아. 그림자들은 말일세.”

이 말을 한 뒤에 노인은 빙그래 웃으며 잠시 뜸을 들였다. 다시 불가에 손을 쬔 뒤에야 말을 이었다.

“이 모닥불이 꺼진다고 생각해 보게. 그럼 어떻게 될까? 그림자로 덮힌 세상일까? 아닐세. 그건 그냥 어둠일 뿐이야. 공허일 뿐이지.”

이 말을 한 뒤에 노인은 천천히 일어섰다.

“그래서, 말하는 걸세. 빛과 그림자는 서로 등을 진 형제와 같다고. 그래서, 어느 한쪽만 사라지거나 할 수 없어. 운명적으로 두 존재는 이 세계를 같이 나눠 쓸 수 밖에 없네. 그게 내가 이 임무에서 깨달은 걸세. 그래서, 아마 내 임무는 영원히 끝나지 않을 걸세. 내가 이 자리에서 자네에게 죽더라도 다른 사람이 그걸 받을테니 말일세.”

방금전까지 친숙한 노인의 표정은 이제 사라지고 없었다. 모닥불이 만들어 낸 역광탓인지 일어서서 자세를 잡은 노인의 몸은 마치 거인처럼 거대해 보였다. 필시 수 많은 전장에서 단련된 몸이 만들어낸 결과일 것이다.

젊은이 역시 자리에서 일어나 자세를 잡았다. 그가 집어 든 검이 머리 위로 높게 치켜 올라갔다.

“어르신, 배풀어 주신 은혜를 갚지 못해 유감입니다. 오히려 배은망덕한 짓을 하게 되는군요.”

“괜찮네, 젊은이. 아니, 마왕. 어차피 내입장에서는 자네나 다른 병사들이나 똑같은 상대 일뿐이니. 서로 목숨을 걸고 싸우는 게 일일 뿐일세. 오히려 나로서는 자네같은 우두머리와 싸우게 된 게 영광이라네. 뭐, 자네가 쓰러지면 다른 친구가 마왕에 등극하겠지만.”

젊은이가 먼저 달려 들었다.

노인은 이제까지 쌓아온 경험을 살려 유유히 그 공격을 흘렸다.

승부는 한 번의 빛 줄기로 결정났다.

“잘가게, 젊은이. 나도 운이 다한다면 아마 곧 볼 수 있을 걸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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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4

벗님님의 댓글

작성자 no_profile 벗님
작성일 02.26 16:18
크.. 세월이라는 나이가 아니라,
숱하게 많은 결투의 경험, 생사를 넘어들며 끝끝내 이 자리까지 오르며 쌓인 나이를 드신 분이셨나 봅니다.
마왕으로서는 생애 처음이자 마지막인 진검승부가 아니었을 지..

재미있는 글 잘 보고 갑니다. ^^

레드엔젤님의 댓글의 댓글

대댓글 작성자 레드엔젤
작성일 02.26 16:30
@벗님님에게 답글 늘 좋은 말씀 감사합니다.^^;

강물님의 댓글

작성자 no_profile 강물
작성일 02.26 21:04
젊은이가 마왕일줄이야~ 노인이 마왕일줄 알았어요~ㅎㅎㅎ
재미나게 읽고 갑니다~ 감사합니다.

레드엔젤님의 댓글의 댓글

대댓글 작성자 레드엔젤
작성일 02.27 09:26
@강물님에게 답글 응원 감사합니다.^^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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