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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가지 이야기 - 13. 파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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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레드엔젤
작성일 2025.03.11 1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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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려왔다가 다시 돌아가네.”

자신의 발목을 간지럽히던 바닷물의 움직임을 느끼며 철수는 중얼거렸다. 마치 누구에게라도 던지고 싶던 말이었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한적한 바닷가에서는 철수의 말을 들어줄 사람이 보이지 않았다.

아직 초여름이라 바닷물에 담근 맨발이 조금 차가왔다. 하지만, 못참을 만한 감각도 아니었기에 그는 그대로 발걸음을 옮겼다.

문득 고개를 들어 저너머에서 일렁거리고 있는 물결을 바라보았다. 마치 큰 스푼으로 힘을 들여 움푹 파낸 아이스크림처럼 파도가 굽은 물결을 만들어내고 있었다. 점점 다가오는 그 물결의 장벽은 간혹 중간에 새로 생긴 또다른 장벽에 가로막혀 흔적도 없이 사라지기도 했다. 이 장벽을 넘어 도달한 물결만이 지금 철수의 발목까지 와 닿았을 뿐이다.

철수는 문득 허무한 미소를 띠었다.

이 파도들은 나름대로 힘겹게 해변까지 왔는데, 기껏 맞이한 게 자신이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우리 관계 같네.”

또 다시 누군가에게 말을 건내듯이 중얼거렸다. 그리고는 다시 천천히 발걸음을 옮겼다.

지난 10년 간의 시간을 돌이켜 보았다.

끝없이 밀려왔다 부서지는 파도처럼 그 시간 동안 벌어진 많은 일들이 허무하게 느껴졌다.

감정의 충돌과 진화, 안정. 또 다시 충돌. 다시 반복.

이런 도저히 끝날 것 같지 않은 반복의 지옥 속에서 철수는 도망치고 싶었다. 10년 동안 그 생각을 계속 머리속에 담고 있었지만, 선뜻 행동으로 옮기지는 못했다. 알량한 책임감이나 자존심 때문만은 아니었다. 이걸 실행하기에 철수의 용기는 아직 부족했었다.

그렇다. 부족했었다. 바로 어제까지만 하더라도 그는 자신이 10년동안 소망했던 걸 이룰 배짱이 없었다.

그에게 용기라는 연료를 채워 준 건 영희였다. 어쩌면 영희와의 관계가 지속된 10년이라는 시간은 그의 한도 끝도 없을 것 같은 결행을 위한 용기를 주입하던 시기였는지도 모른다.

결국 조건이 갖추어지자 마자 철수는 곧바로 행동에 옮겼다.

평소와 달리 영희에게 모진 말을 쏟아 부었다. 상대도 지지 않고 그에게 같은 말로 응전했지만, 그 상황에서 철수에게 대항하는 건 영희로서는 역부족이었다.

영희의 눈가에 눈물이 맺힌걸 봤지만, 철수는 그대로 등을 돌렸다. 그 뒤로 영희가 그에게 뭐라고 말했는지는 전혀 기억나지 않았다. 그러기에는 그의 머리가 단 하나의 행동을 촉구했기 때문이다.

철수는 그대로 차를 몰아 도로로 나왔다. 하지만, 막상 나와 보니 특정한 목적지를 정하지 못한채 이리 저리 부유하는 낙엽처럼 도로의 흐름에 떠밀려만 갔다.

우두커니 운전대를 잡은채 앞만 주시하던 그를 일깨운 건 전화벨 소리였다.

영희였다. 그녀에 대한 착신음을 ‘제주의 푸른 밤’으로 했으니, 소리의 첫음절만 들어도 알 수 있었다.

“언제 한 번 같이 가자고 했는데…”

그 생각에 씁쓸함이 가슴 속에 자리 잡았다. 하지만, 그리 오래 가지 못했다. 철수는 그대로 전화기를 진동으로 바꿔 버렸다. 음악 소리를 계속 듣고 있자니 자신의 행동에 죄책감을 느꼈기 때문이다.

“바다로 가자.”

전화벨 소리 때문 이었는지 아니면 그저 허한 마음을 달래기 위해서였는지 철수 자신은 종잡을 수 없었지만, 그는 이 답답한 도로에서 당장에라도 벗어나고 싶었다.

그래서, 당도한 이 곳은 세상이 멸망하고 그 혼자 남겨진 것 같은 분위기를 자아냈다.

평일에 자신과 같은 일탈행동을 할 사람이 아니라면, 이 곳처럼 외진 장소는 찾지 않았을 것이다.

지속적으로 들려오는 파도 소리만이 철수 주변을 맴돌 뿐 그 어떤 소리도 이곳에서는 들리지 않았다.

이제 발목이 시렵기 시작했다. 자신도 모르게 오랫 동안 맨발인채로 걸은 모양이다. 아닌게 아니라 뒤를 돌아보니 타고 왔던 차는 꽤 멀리 떨어진 곳에 덩그라니 남아서 주인을 기다리고 있었다.

순간적으로 그 모습이 영희와 겹쳐 보였다. 그리고 다시 갈까하다 철수는 다시 몸을 돌려 걷기를 선택했다. 그렇지만, 그 결심은 너무도 쉽게 흔들렸다. 다시 한 번 몸을 돌려 차를 보고, 다시 몸을 돌려…

마치 미친 사람이 살풀이 춤을 추듯이 철수는 그 자리에서 이리 저리 몸을 돌려댔다. 한참을 그렇게 멍청한 동작을 반복하다 지친 상태로 멈춰 버렸다. 눈에 들어온 차쪽으로 당장에라도 달려가고 싶었다. 그렇지만, 쉽게 발걸음이 내딛여 지지 않았다. 그의 몸은 자꾸만 그 반대 편으로 돌려고 했다.

그의 마음을 정하게 한 건 하나의 울림이었다. 처음에는 무시하려고 했지만, 그 울림은 고집스럽게 계속 되었다.

가슴께로 손을 뻗어 휴대폰을 꺼내 들었다. 익숙한 이름이 화면에 새겨져 있었다.

철수는 벨소리를 켰다. 익숙하고 포근한 음악이 시작되었다. 언제까지라도 듣고 싶을 정도로 그는 한동안 이 음악에 취해 있었다.

어쩌면 전화를 건 이도 음악에 취해 있었는지도 모른다. 음악은 끝나지 않고 영원히 계속 될 것처럼 반복되고 있었다.

철수가 통화 버튼을 누른 건 이윽고, 취기가 절정에 올랐을 때였다.

밀려왔다가 다시 돌아가는 파도처럼 이제 그가 돌아갈 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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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2

벗님님의 댓글

작성자 no_profile 벗님
작성일 03.11 11:41
기다림이다.
나아갈 만큼 나아가는 걸
붙잡지 못하고 그저 바라만보며 애타하는 기다림이다.

한쪽 끝에서 한쪽 끝으로 왔다 갔다를 반복하는 추.
나는 어느 즈음에 있을까.
외면하며 멀어지는,
혹은, 가슴 한 켠 뚫는 그 공허함에 눈물을 쏟아내는.

서로가 다시 손을 맞잡고
서로가 다시 서로의 체온을 느끼며
온전함으로,
사랑으로,
그렇게 다시 되돌아가는 그 과정,
그 기다림이다.


좋은 잘 보고 갑니다. ^^

레드엔젤님의 댓글의 댓글

대댓글 작성자 레드엔젤
작성일 03.11 15:08
@벗님님에게 답글 말씀 감사합니다. 철수와 영희 시리즈 3탄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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