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줄 글쓰기] 오늘의 한 단어 - 입술
페이지 정보
본문
<위 이미지는 김성진 님의 작품입니다>
"야, 그만 처먹어. 여기가 어디라고. 입구에서 직원이 뺏지 않았어?"
내 퉁박에서도 아랑곳하지 않고 M은 쿠키 부스러기를 흘려가며 대꾸했다.
"쳇, 이 갤러리 사장의 금지옥엽 무남독녀가 누구야? 바로 나야. 감히 누가!"
M은 상삼백안이 되어 나를 깔아보더니 턱을 들고 말을 이었다.
"이따위 것들이 무슨 예술이라고. 돈이 있어야 예술이야. 그리고 아빠 돈이 없으면 이 작품이랄 것들이 어떻게 이 자리에 전시됐겠어?"
참 지랄도 풍년이다. 괜히 M의 갤러리에 왔나 싶었다. 아무래도 유난히 히스테릭한 것이 오늘 생리인가? 그렇다고 M에게 맞추어 주고 싶은 마음이 들진 않았다. 너 생리? 나도 생리다!
"흥, 오늘은 안 틀리고 한자성어들을 줄줄이네. 오기 전에 입술에 무슨 먹물 기름이라도 바르고 나왔나 봐."
"이정돌 누가 틀려 틀리긴. 글고 다들 틀리게 쓰면 그게 맞는 거라고. 언어의 사회성 몰라?"
더이상 대꾸하고 싶지도 않다. M은 머리엔 든 건 없지만 디올 파우치에 5만원 현금권이 충만했기에 참고 친구 삼아 다녔다. 종종 비위를 맞춰주기도 하지만 기어오를 때는 좀 밟아줘야 했다. 그러나 오늘은 좀 참는다. M을 따라 전시 뒤풀이에 가야 했기 때문이었다.
보름 뒤에 O션 미술품 경매 이벤트가 예정되어 있다. 작은 규모이기는 하지만 우리나라 원로 작가의 작품 및 중견 작가의 대표작 몇 작품이 경매에 오를 것이다. 내 최초의 경매사 이력이 될 중요한 이벤트였다. 내가 팔아야 할 작품의 작가, 그 작가를 오늘 뒷풀이에서 만날 것이다. 밋밋하게 시작할 생각은 없다. 첫 판부터 대박이어어야 한다. 그러려면 준비가 필요했고 오늘이 그 준비의 완성이 될 것이다.
우선은 몸에 힘을 빼자. 모든 전문가는 몸에 힘을 뺀다. 축 늘어진다는 말이 아니다. 필요한 곳에 필요한 만큼만 긴장을 유지한다는 말이다. 저녁 뒤풀이까지는 아직 시간이 남았고 난 작가의 마음을 온전히 끌어내기 위해 전시된 그의 작품을 하나하나 훑어 보았다.
'입술....'
회랑을 거닐던 내 느긋한 다리는 한 작품 앞에서 굳어 버리고 말았다. 운보의 '군마도'를 봤을 때의 벅찬 감동과는 다른 무엇이었다. 회랑 한쪽 면 가득한 입술, 빨간 립스틱이 바른 그 입술의 섬세한 주름 하나나가 모두 살아있는 그런 그림이었다. 만지면 당징이라도 물기를 내뿜을 것 같은 입술이 나를 압도했다.
"쳇, 내 입술이 더 예쁘네."
M의 헛소리가 내 신경을 다시 긁었다. 쿠키 부스러기가 잔뜩 붙은 그 입술을 짓이기고 싶은 충동이 요동쳤다.
벗님님의 댓글
탄탄하고 배려심이 넘치는 젊은 남자를 좋아하긴 하지만,
저 입술을 나를 단숨에 사로잡았다.
허리춤을 낚아채며 내 입술을 당장이라도 덮어버릴 것 같은
'당신을 사랑해요'라는 한 마디로 나의 성정체성을 뒤흔들어버릴 것 같은
그런 입술이었다.
작품 앞에서 발길을 때지 못하고 있는 나를 M이 다시 긁어대기 시작했다.
"너무 빨게, 뭐를 잡아 먹은 거 같잖아."
하.. 그래, M이라면 충분히 게걸스럽게 뭔가를 잡아 먹었을 테지.
젊은 남자가 바로 앞에서 바라보고만 있지 않으면 말이야.
'호호호, 저.. 이런 거 잘 못 먹어요' 라고 하며.
"그림이.. 마음에 드십니까?"
어느 새 다가왔는지 어떤 남자가 뒤에서 조용히 말을 붙였다.
슬쩍 돌아봤다가 시선이 올라갔다. 키.. 키가.
바로 답을 하지 못 했다. 멋진 수트의 그 남자는 그 입술을 바라보고 있었다.
잘 쓰셨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