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줄 글쓰기] 오늘의 한 단어 - 필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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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어디가니 210.♡.254.193
작성일 2024.10.02 12: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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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분 다들 잘 아시겠지만, 현대의 수사학(搜査學)은 두 번의 큰 고비가 있었습니다. 누가 이야기해 볼까요?"


땅달막한 교수는 콧수염으로 장식한 입에서 파이프를 떼며 입을 열었다. 파이프에서 하얀 담배연기가 흘러나왔지만 아무도 개의치 않았다. 니코틴은 연기가 아니라 파이프를 문 입술을 통해 흡수되었다. 연기는 흡연 행위의 시각적 만족을 위해 파이프에 추가된 기능일 뿐이었다. 니코틴 또한 비타민처럼 일정 시간이 흐르면 체내에서 자연 분해되거나 배출되었다. 흡연은 말 그대로 교수의 기호(嗜好)일 뿐이었다. 그의 모습은 에르퀼 푸아로(Hercule Poirot)를 연상시켰지만 소파에 엉덩이를 깊숙이 밀고 앉아 파이프를 문 모습는 셜록 홈즈(Sherlock Holmes)를 떠올리게 했다. 강의 넷룸에 잠깐 정적이 흘렀지만 곧 한 생도가 대답을 했다.


"디지털 시대의 도래입니다."

"맞습니다. 22세기 이후 수사관들은 디지털 자료의 조작 가능성을 확인하기 위해 골머리를 썩였죠."


사건 증거를 모으고 이를 논리적으로 배치한 후 사건의 정황 및 관련자들의 증언과의 일치성을 검증하는 것이 수사의 시작이며 끝이었다. 그런데 디지털 시대가 된 후부터는 증거 그 자체에 대한 검증이 늘 문제시되었다. 디지털 기술 초창기였던 20세기 후반에서 21세기 초반에는 그나마 나았다. 인류의 삶이 아직 아날로그 세계에서 굳건히 뿌리를 두고 있어서였다. 그런데 22세기 디지털 기술이 비약적으로 발달하며 인간의 삶은 거의 네트워크 속에서 이루어졌다. 그 말은 개별 자료 단위가 아니라 세계 전반에 대한 조작이 가능해졌다는 의미였다. 지금의 법정은 늘 증거의 조작, 훼손 가능성에 대한 변호인의 추궁에서부터 시작되었다. 사실 그 수사 시작 단계에서 이 가능성을 해소하지 못하면 영장조차 발급받기 어려웠다.

피의자의 자백이 한때 주요 증거가 되기도 했지만 '전뇌화'가 시작된 이후에는 이조차도 방증으로 간주되었다. 전뇌 해킹을 통해 조작된 기억과 의도에 따라 자백하는 경우가 늘면서부터였다.


교수는 의미심장한 미소를 띠며 재킷 안주머니에서 무언가를 꺼냈다.


"이게 뭔지 아는 사람 있습니까?"

"필름입니다."


넷룸이 시끌벅적해졌다. 현대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물건이었다. 그렇다고 박물관에서나 볼 수 있는 그런 특별한 가치가 있는 물건이었다. 생도들은 교수가 19~20세기에 대한 기벽적인 향수에 이끌려 신기한 무엇인가를 또 가져왔다는 데 즐거워했다.


"아날로그 자료는 늘 '원본'이 있습니다. 이게 그 전형이고요. 지금 여러분의 홀로스크린에 투영된 것은 이의 '사본'에 해당합니다. 전 이 강의를 할 때마다 '원본'의 존재가 늘 사랑스럽습니다. 디지털 시대 이전에는 이 원본을 확보하는 것이 관건이었죠. 그럼 이후에 증거 확보의 핵심은 무엇인가요?"


넷룸의 소란 속에서도 대답이 들려왔다.


"무결성입니다."

"그렇죠. 원본과 사본의 개념이 무의미한 디지털 자료에서는 자료들 간의 '무결성'이 핵심이 되었죠. 증거의 확보라는 측면에서 '무결성' 확인은 아주 큰 주제였습니다. 자체적으로 헤값의 비교와 서버 로그 분석, 그리고 디지털 지문 분석 등 여러 기법들이 만들어지고 발전되어 왔습니다."


수업이 본격적으로 진행되려는 참 넷룸에서 짜증 섞인 소리가 들려왔다.


"시간여행 시대에 그런 게 다 뭐라고?"


교수는 손가락으로 콧수염을 말아 올리며 다른 손으로 그 생도를 찾아 넷룸에서 추방해 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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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1

벗님님의 댓글

작성자 no_profile 벗님 (106.♡.231.242)
작성일 10.02 14:55
"흐음, 그래요, 저 학생이 한 말도 충분히 일리는 있어요, 하지만.."

교수는 콧수염을 살살 만지며 말아 올렸다.
자신의 원하는 각도에 다다르면 그 만큼 강의의 깊이가 깊어지는 것일까.

"시간이동은 우리 수사관들 뿐만 아니라 사회 전반을 죄다 흔들어놓았어요.
아시다시피 여러 제약과 규칙이 생겼고, 불가피하게 불법 시간이동자들은
특정시간대에 가둬버리는 형벌도 생겨났지요.
이 모든 게 지극히 불가피한 조치였음은 이미 모두 아실테고,
사건 추적의 범주로 보면, 우리는 새로운 신세계에 발을 드린 거에요."

교수는 천천히 교단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완벽한 증거를 찾는 것에서 시작해서, 증거의 조작 가능성을 확인하고,
 이제는 증거의 시간 변이에 대한 무결성까지 추적하는 방식에까지 이르게 된 거죠.
 우리가 승기를 잡았다고 볼 수 있어요.
 촘촘하게 시간 변이의 무결성을 완성하기란 사실상 불가능에 가깝다고 볼 수 있으니까요."

학생 하나가 넷룸에서 손을 들었다. 작은 불빛이 깜빡거렸다.
교수가 검지 손가락을 까딱거리니, 넷룸의 중앙 스크린에 학생이 커다랗게 표시됐다.

"교수님, 하지만 현재도 미결사건들이 발생하지 않습니까?
 시간 변이의 무결성도 어떤 사건에서는 신뢰도가 급락하기도 하고요."

"맞아요. 깨진 유리잔의 파편들을 시간을 되돌려 맞추는 것은 가능하지만,
 일부 조각을 감추고 이걸 조립하는 것은 불가능하죠. 어딘가 빈틈이 생겨요.
 이 시간변이의 무결성, 이것이 수사의 핵심이 되긴 했는데..
 여전히 미결사건들이 나타납니다. 어떻게 그게 가능한 걸까요?"

중앙 스크린의 학생은 손을 들까 말까를 망설였다. 자신의 추측에 확신이 없었다.
콧수염을 말아올리며 교수가 손짓했다. 그래, 그래서 너 학생이고, 난 교수인 거야.

"괜찮아요, 얘기해봐요. 어떻게 그게 가능할까요? 어떻게 무결성을 깨뜨린 걸까요?"


잘 쓰셨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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