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화강 이야기 - 15. 45년째 안 친한 그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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점심 시간이 20분 남았다.
파란 하늘 아래 솜사탕 같은 하얀 구름이 피어나고,
바람을 타고 코끝을 간질이는 달달한 향기가 어디선가 흘러왔다.
인공적으로 만든 향이 아닌데?
점점 진해져 오는 향을 향해 몇 걸음 걷다 보니,
구수한 사투리를 쓰는 한 무리의 방문객들이 눈에 들어왔다.
조형물 앞에서 사진 촬영에 한창인 그들은
마치 오늘 인생사진을 건지겠다는 듯한 결의에 차 있었다.
곱게 분 바르고 연지 찍은 얼굴, 화려한 옷차림이 어우러져 준비는 완벽했다.
12시가 되었다.
어디고 풀밭에 가서 드러누울 요량으로 그 옆을 지나쳤다.
그런데 여인네들의 볼멘 투정 소리가 들렸다.
사진 한 장, 한 장에 각자의 요구를 담아내느라 여인들은 분주했고,
남편들은 그 요구를 맞추느라 지쳐갔다.
달달한 향기는 어느새 사라지고, 공기가 점점 싸늘해졌다.
나는 발걸음을 돌려 다가갔다.
“안녕하십니까? 제가 사진을 찍어드리겠습니다.“
순간, 지쳐버린 남편들의 얼굴에 주름살이 하나 펴지는 듯했다.
단체 사진부터 시작해 커플 사진, 개인 사진까지 차례로 찍어드렸다.
어느새 이장님께서는 커플별로 줄을 세우고 계셨다.
그런데, 일행에서 멀찍이 떨어진 곳에서 이 모든 헤프닝을 못마땅하게 쳐다보던 한 남성이
개인 사진을 찍어달라며 포토존 한가운데로 들어왔다.
나는 속으로 ‘사별하셨나보다, 서운하셨겠구나’ 라고 생각하며 조심스레 말했다.
”선생님, 세상 다 가진 표정으로 하늘을 쳐다보고 웃어주세요.“
그 말에, 이제껏 사진 찍기를 거부했었던 한 여성도 포토존으로 들어왔다.
두 사람은 어색한 미소를 지으며 포토존에 섰다.
몇 장을 찍어도 서로 눈길 한 번 주지 않았다.
양보할 기색이 없어 보였다.
“두 분, 친한 척 해주세요.”
두 사람은 동시에 손사레를 치며 말했다.
“우리는 안 친해요”
일행들도 한목소리로 외쳤다.
”쟈들은 우째 45년째 안 친해!“
다들 웃음이 터졌지만, 그들의 말투는 왠지 모르게 다정하고 따뜻했다.
나는 다시 말했다.
“남편분, 아내분 허리에 손을 얹어보세요.”
남편은 진지한 얼굴로 아내를 바라보며 말했다.
“허리가 어디 있다고. 자네, 그런 게 있었는가? 나는 여직 못 본 것 같은디.”
그 진지한 말투에 모두가 웃음바다가 됐다.
아내는 진지하고도 성실하게 아내의 등을 더듬으며 찾고 있던 남편의 손을 잡아 허리 쪽으로 올리면서
나를 보고 고개를 끄덕였다.
남편은 여전히 진지하게 말했다.
“여가 거당가? 거시기…”
45년째 안 친하다는 그들의 미소 속에서 세상 가장 다정한 향기가 묻어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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