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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가지 이야기 - 1. 미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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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레드엔젤
작성일 2025.02.19 18: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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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7 조회
1 추천

본문

벗님이 재미있는 의제를 내주셔서 저도 한 번 도전해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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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구가 정말 있을까?”

철수는 투덜거리며 발걸음을 옮겼다. 눈 앞을 가로 막고 서 있는 벽들은 도무지 그 끝이 보이지 않을 지경이다.

“계집애. 정말이지, 이런 걸로 사람 엿먹이네.”

오늘 아침 살짝 다툰 영희가 들었다면, 아마도 또 한소리를 했을 게다. 하지만, 지금 영희는 곁에 없다. 아마도 먼저 출구쪽에서 나와 기다리지 않을까?

“고 계집애. 이런 놀이 동산이 뭐가 좋다고 그렇게 지.랄.지.랄.을 했던거야?”

또 다시 막힌 벽이 눈앞에 보이자 철수는 아까보다 더 심한 욕을 내뱉는다. 시계는 보지 않았지만, 한 참 동안 돌았을 게다. 그로서는 이런 낭비적인 일에 시간을 버리는듯한 행동이 도저히 용납되지 않았다. 하지만, 어쩌랴, 여자친구의 성화를 그는 도무지 이겨낼 수 없었을 것을.

혹시나 해서 주머니 속에 들어 있던 휴대폰을 꺼내 보았다. 아직 영희가 메신저 창으로 뭔가 말을 하지는 않은 모양이다. 보아하니 먼저 나가서 어딘가에서 한적하게 쉬고 있으리라.

“놀러왔으면 나랑 같이 있어야지. 남자친구를 떼어 놓고 지 혼자 먼저 미로 들어가는 게 어디었어?”

마치 눈앞에 그녀가 있다는 듯이 철수는 불평을 늘어 놀았지만, 무슨 소용이 있을까? 영희가 들을리는 만무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렇게 늙은 할아버지의 옛날 이야기 주머니를 꺼내듯이 길게 탄성처런 내뱉는데는 철수 나름의 이유가 있었다.

평소에 철수는 영희 앞에서는 한마디도 불평을 하지 못했다. 그도 그럴 것이 사내에서 가장 예쁜 영희를 쟁취하기 위해서 얼마나 많은 노력을 했던 그였던가 말이다. 간이나 심장도 내달라면 내줄정도로 철수는 오랜 시간 공을 들여 왔다. 그렇기에 이들의 관계는 다소 일방적인 주종관계처럼 영희가 언제나 주도권을 쥐는 형세였다.

“내가 그때 미쳤지!”

다른 쪽 벽을 만나자마자 철수는 반사적으로 외쳤다.

그의 표현대로 영희에게 미쳐있던 건 분명했다. 영희도 자신의 외모가 사내에서 꽤 반반하 축에 든다는 걸 알고 있었기에, 초반에는 숱하게 철수에게 퇴짜를 놓았던게 아닌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철수는 다소 고집스럽고 끈기가 있는 녀석이었다. 더욱이, 마음에 드는 연애 대상을 발견하고 난 다음에는 이 쇠고집같은 근성과 끈기가 더욱 더 강화된 느낌이었다.

“미안해요.”

“안돼요.”

“저 사귀는 사람 있어요.”

거절의 말이 이렇게 다양하게 있을 줄은 철수도 미처 몰랐다. 그러나, 사랑에 눈이 뒤집힌 남자에게 그런 말이 과연 얼마나 들어 왔겠는가? 기어이 철수는 자신이 원했던 바를 이루게 되었다. 물론, 꽤 큰 위험을 감수하고 말이다.

“어이쿠! 이런! 씨…”

욕을 마저 완성하지 못한 철수는 나무 슬로프를 보면서 그때를 잠시 떠올렸다. 하마터면 이 슬로프에 걸려서 넘어졌을 지도 모를 일이었다. 시지프스가 경사도 높은 비탈길로 그 큰 바위를 굴려 가듯이 한 철수의 노력은 급격하게 굴러 떨어지는 바위처럼 아찔한 순간을 만들고야 말았던 것이다.

“자꾸 이러시면 스토킹으로 신고할거에요!”

“신고하려면 신고하세요! 차리리 신고하십시요! 회사 인사처든 경찰이든!”

이렇게 되었으면 될때라 되라라는 심정으로 지른게 지금의 그에게는 화근이었다. 물론, 그 당시에는 시지프스 그 험난한 경사로에서 옆으로 뛰어 내린듯한 뜻밖의 묘수이자 행운이었다고 생각했지만 말이다.

“어이쿠! 여기에 통로가 있었구만!”

슬로프를 올라가다 마주친 새로운 통로에 철수는 반가운 목소리로 외쳤다.

돌이켜보면 영희는 철수에게 언제나 궁금중과 호기심의 대상이었다. 도무지 그 생각이나 마음을 종잡을 수 없었고, 금새 토라지거나 언제나 뭔가로 철수를 타박하곤 했다.

그러나, 아까 우리가 지나치듯이 언급했던 말을 기억하는가? 철수는 이런 상황에서도 끈기 있게 답을 찾으려 애썼다.

더러는 근사한 식사를. 어떤 때는 철수 본인의 관심사는 아니지만 자뭇 고상하게 보일듯한 전시회장에. 보고 싶다는 영화를 보러 가기도, 혹은 대부분은 이해하기 난해한-물론 감독 이름은 혀가 삘 정도로 길고 어려운 발음이기도 했다.-소위 예술 영화나 연극을 보러 갈때도. 그는 인내심을 최대한 발휘해 그녀와 함께 했다.

물론 위기가 없었던 건 아니다. 예술 영화가 어찌나 졸리던지 철수는 연신 자신의 허벅지를 꼬집어 가며 감겨 오려는 눈을 치켜 떠야만 했다. 또, 연극은 왜그렇게도 길은 건지. 한 번은 그 자리에서 소변을 볼 정도로 큰 낭패를 겪기도 했었다.

누군가 그런 철수의 노력을 봤다면 박수를 쳐주었을지도 모를테고, 누군가는 미련한 곰투가리같은 녀석이라고 손가락질을 할런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런 고문에 가까운 끈기를 뒷받침해 준 것은 영희에 대한 애정보다는-물론 45%정도는 애정이 기초였을 거라고 해주자.-과연 그녀가 좋아하는 것이나 만족할 만한 게 뭘까라는 그의 아이같은 호기심이었다.

눈먼 호기심은 한 젊은이에게 이런 초인같은 힘을 선사해 주니, 참으로 경이롭기 그지 없다고 할 수 있겠다.

“지금쯤 뭘하고 있을까?”

또 다시 머리 속에서 벌떡 일어선 호기심이-다른 곳도 일어섰다면 또 몰랐겠지만… 이 불쌍한 친구야-그의 바지 주머니에서 휴대폰을 꺼내게 했다. 아직 영희에게서 문자 메시지는 오지 않은듯 했다. 시간을 보니 ‘츳’하면서 혀를 찰 수 밖에 없었다.

휴대폰의 큰 숫자는 철수는 거의 한 시간 가까이 이 망할놈의 미로 속을 헤매고 있었다는 걸 알려주었다.

“전화를 걸어서…”

도저히 답을 찾지 못하겠다는 듯이 영희에게 전화를 걸려하다 그는 말을 끊었다.

“아오! 18!”

기어이 쌍욕이 그의 입밖으로 튀어 나왔다. 휴대폰 화면 상단에는 ‘통화권 이탈’이라는 문구가 그의 이런 폭발한 이유를 설명해 주었다.

“뭔놈의 놀이 동산이 휴대폰도 안터져!”

“이 놈의 미로는 대체 왜 이렇게 끝도 없어!”

“영희! 이 망할 기집애! 이딴 거지 발싸개 같은 곳에 날 두고 가다니!”

“빌어먹을 놀이동산 사장놈!”

“드림랜드? 놀이 동산 이름이 뭐 그 따위야! 뭐가 드림랜드야! 여긴 꿈도 희망도 없어!”

이 외에도 철수는 도저히 알아 들을 수 없는 이런 저런 괴성까지 섞어가며 영희를, 세상을, 그리고, 멍청하게 속아서 이 미로에 남은 자신을 저주했다.

“저기야! 저기!”

그때 갑자기 가까운 곳에서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려 왔다. 철수는 황급히 소리가 나는 곳으로 달려갔다. 운좋게 소리가 들려오는 쪽으로 코너로 꺽인 길이 보였다.

“이봐요! 거기 누구 있어요?”

벽 저편에서 또 다른 목소리가 들려왔다. 소리의 크기를 보건대 꽤 가까운 위치인것 같았다. 바로 벽을 넘으면 들릴 정도로.

“네! 여기 사람있습니다!”

철수는 초음파를 내뿜으며 길을 찾는 돌고래처럼, 다른이들의 소리를 길잡이 삼아 바쁘게 뛰었다. 다행히 그가 도는 모퉁이마다 새로운 길이 반겨주듯이 열려 있었다.

“아! 나왔다! 나왔어!”

“김순경, 행방불명자를 찾았다! 입구에서 더 들어가지 마라, 오버!”

“어?”

이게 무슨 말인가? 철수는 어안이 벙벙한 얼굴로 주변을 둘러 보았다. 방금 말한 사람은 경찰인듯 제대로 정복을 입고 어깨에 맨 무전기에서 손을 떼고 있었다.

“행방불명이요? 누가요?”

“저기 있는 아가씨가 신고했어요. 선생님, 괜찮으신거지요?”

철수는 얼빠진 표정으로 경찰이 손가락으로 가르킨 곳을 보았다. 그쪽에서 익숙한 사람이 달려오고 있었다.

“영희야!”

철수는 마주 달려가 그녀를 안았다. 자세히 보니 영희의 얼굴은 온통 눈물로 덮혀 있었다. 그로서는 왜 그녀가 울고 있었는지 알 수가 없었다.

“선생님이 미로에서 길을 잃은것 같다고 신고가 들어 왔어요.”

다소 힘이 빠진 경찰이 설명하는 목소리에 철수는 그제야 상황을 파악했다.

“걱정했잖아! 이 바보야!”

타박하는 영희의 눈에서는 여전히 눈물이 그치지 않을것 같았다.

“흠! 흠! 앞으로 주의하세요. 가보셔도 됩니다.”

경찰관은 겸연쩍은 표정을 지으며 두 사람에게 가라는 손짓을 해 보였다. 철수 역시 뻘쭘한 얼굴을 한 동안 지으며 영희를 부축해 자리를 떴다.

한참을 지나서 발견한 벤치에 두 사람은 앉아 잠쉬 다리를 쉬었다.

“나 화났어.”

“에? 왜 또? 뭔데? 내가 뭘 잘못했는데?”

“내가 왜 화가 났는지 몰라?”

“모르겠는데…”

아뿔싸!

“됐어! 나만 항상 맘 고생이지. 자기는 아무것도 몰라!”

철수는 영희의 타박을 들으면서 마음속으로 비명을 질렀다.

“정말로 출구가 있을까? 이 미로에?”

“출구가 정말 있는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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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2

벗님님의 댓글

작성자 no_profile 벗님
작성일 02.20 10:32
흐흐, 빠져나올 수 없는 '사랑의 미로'네요.
어떤 분들은 어렵게 어렵게 찾아도 찾아지지 않는다죠. ^^;

재미있는 글 잘 보고 갑니다. ^^

레드엔젤님의 댓글의 댓글

대댓글 작성자 레드엔젤
작성일 02.20 10:33
@벗님님에게 답글 말씀 감사합니다.^^
"내가 왜 화가 났는지 몰라?"
이거... 정말 무한의 미로입니다.ㅜ.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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