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가지 이야기 - 3. 이방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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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 가지고 세상 살수 있겠냐?”
반 비아냥스런 말로 사장 한 명이 나에게 말한다. 다른 사장은 늘 그렇듯이 선뜻 말릴 생각은 하지 않은채이다. 그는 신문을 들어 올리며 열중하는 듯 짐짓 모른체한다.
“야! 알바! 손님 왔다!”
사장이 황급히 떠밀듯이 나를 복사기쪽으로 밀었다. 방금 전까지만 하더라도 일종의 정신교육을 빙자한 훈계를 하던 차인데, 손님만 오면 뭔가 태도가 싹 변하는게 나는 늘 신기했다.
“이 책 복사 떠 주세요.”
나에게 건내진 책은 제법 두툼한 원서였다. 전파 망원경이 그려진 이 책은 내가 휴학하기 전 2학년때 접했던 책이라 반가운 마음도 들었다. 지금은 생활고로 어느 학교 복사집에서 아르바이트로 일하고 있었지만, 나도 예전에는 책을 건낸 학생처럼 이 책을 가지고 밤낮으로 레포트를 쓰며 끙끙 앓았던 시절이 있었다. 다시 한 번 그 시절로 돌아갈 수 있을지는 알 수 없지만, 아마도 당분간은 이 곳에서 복사를 하면서 돈을 모아야 하지 않을까 싶다.
조심스럽게 책을 펼치고 발판 스위치를 눌렀다. 스캔을 위한 기다란 불빛이 쓰윽 하고 한 번 지나간다. 그 타이밍에 재빨리 책장을 넘기며 다시 한 번 발판 스위치를 누른다.
페이지는 600페이지가 조금 넘는다. 양면을 펼침으로 복사할테니, 발판은 300번 조금 누르면 될 것이다.
“야, 우리 먼저 점심 먹으로 간다.”
훈계했던 사장이 대수럽지 않다는 듯이 말하며 구내 식당으로 향한다. 그를 따라서 방금전까지 신문을 읽고 있던 또 다른 사장도 슬그머니 자리에서 일어난다.
“광희씨, 우리 먼저 먹고 올게. 가게 좀 잘 봐.”
직원 한 명이 사장들을 따라 나가면서 나에게 말했다. 복사기에 매달려 씨름을 하느라 나는 대답도 제대로 못한다.
그는 직원이다. 나는 아르바이트 생이고.
그는 언제나 나에게 그 점을 강조하느라 애쓴다.
“광희씨, 대학교 좀 다니다 왔다고 건방떨면 안돼요. 나는 정직원이고 당신은 알바니까.”
아침일찍 출근해서 가게준비를 위해 둘이 있을 때 그는 항상 나에게 다짐하듯이 이렇게 말했다.
그렇다. 나는 이곳에서 이방인이다. 어느 한 대학가의 복사가게에 아르바이트생으로 있지만, 그곳에서 나는 어디에도 속하지 않는다.
“좀 너무 하네. 기다렸다 같이 가지.”
책을 맡긴 학생이 혼잣말처럼 말하다가 슬쩍 나를 본다. 혹시라도 내가 무슨 반응이라도 할까하고. 하지만, 나는 도통 이런 대화에 잘 끼어들지 못해서 그저 묵묵히 발판 스위치를 누를 뿐이다.
“다 됐습니다. 한 번 확인해 보시겠어요?”
“잘 됐네요. 감사합니다.”
얼마 안되는 돈을 나에게 쥐어주고 학생은 원본 책과 복사지를 들고 바쁘게 돌아나갔다. 그가 나간걸 확인한 뒤에 나는 추가로 복사한 복사지를 기계에 걸었다.
“한 50부면 되겠지?”
부수 버튼의 숫자키를 조작하자, 곧바로 고속 복사가 시작되었다. 용돈이 쪼들리는 학생들이 비싼 원서를 살리는 만무했다. 선배에게서 빌리든 도서관에서 대출을 받든, 책을 들고와 복사를 요청할 것이다.
미리 뽑아 놓으면 꽤 시간을 아끼리라.
“누가 그렇게 하래? 니가 사장이야!”
사장1(오전에 나에게 훈계했던)이 불같이 화를 냈다. 사장 2(오전에 신문을 읽던)는 혀를 끌끌차며 다시 신문을 펼쳐 들었다. 아침에 보던 바로 그 페이지 그대로였다.
“광희씨. 대학 좀 다녔다고 우리 무시하는 거야?”
직원도 한 마디 거들며 얼굴을 붉혔다.
“그 책 사용하는 과가 아마 50명 가까이 되니까 미리 복사해 두었습니다.”
라고 말하고 싶었지만, 그만두기로 했다. 이들에게 자동 복사 기능은 나같은 아르바이트생이 사용하면 안되는 사치품과 같았다. 뭐, 그러니 이 가게가 본인들 것이니, 괜하게 종이를 낭비한다고 생각해도 어쩔 수 없다. 사장들이란 그런 것에 민감할 수도 있을테니까.
사장들이 민감하게 반응하는 이유는 그 외에도 또 하나 있었다. 얼마전에 학과행정실 담당자랑 심각한 표정으로 이야기를 나누는걸 얼핏 들었다. 재계약 문제로 이런 저런 이야기가 오고간 듯 하다.
“이전 사장님이 체결하신 장기 계약이 올해면 만료됩니다.”
“아니, 그래도 그렇지. 이렇게 갑자기 빼라고 하면 저희는 어떻게 합니까? 할아버지때부터 물려 받아서 사촌끼리 동업하고 있는 건데. 임대 재계약이 안되면 저희들 두 가족은 길거리에 나 앉아요.”
평소 신문만 펼쳐들던 사장 2가 하소연을 했다. 그가 그렇게 길게 많은 말을 하는 건 그 날 처음 본 것 같다. 사장 1은 한 숨만 푹푹 쉬며 연거푸 천장만 올려다 보느라 고개짓을 했다.
그 와중에 직원은 행정실 담당자와 사장들 사이로 눈을 굴리느라 바빴다. 머리를 움직이지 않고 그렇게 눈만으로 사람들을 쫓는게 가능할 줄이야. 나로서는 흉내도 못낼 재주였다.
담당자가 할 말은 전했다라는 듯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사장들의 얼굴이 몹시 굳어져 있었다. 나는 혹시라도 불통이 튈까 슬며시 자리를 비켰다. 나중에 화장실이라도 다녀왔다고 할 셈이었다.
“저기, 새로 들어온다는 복사집 사장님 연락처 혹시 아세요?”
가게에서 조금 떨어진 복도켠에서 행정실 담당자를 불러 세운 직원이 물었다. 그는 연신 두 손을 비비며 웃음을 짓느라 애를 쓰는 것 같았다. 그리고는 분주하게 목을 움직여 좌우를 살폈다. 나는 그의 눈에 띄지 않게 복도의 사각으로 살짝 빠졌다.
“여기에요.”
“감사합니다.”
“그래도, 연락해 봤자 소용없을 거에요. 이미 일할 사람 뽑아놓고 대기중이라고 들었어요. 거기는 우리 학교 전체 복사집이랑 매점을 인수한다고 했어요.”
“그게 가능해요?”
“모르지요. 저희도 위에서 시키는대로 하는 거니까. 그래서, 이 복사집처럼 임대 계약이 만료된 곳은 재계약 안하기로 한거에요. 학교 입장에서도 업체 돌리는게 여러가지로 더 이득이고.”
“그래도 저도 어떻게 안될까요? 행정관님이 힘써 주시면…”
“우리랑 관계없는 거에요. 그 업체가, 그 사장님이 알아서 하는 거구. 연락처 드렸으니까, 알아보세요. 나는 거기까지에요.”
“네.”
풀이 죽은 직원의 목소리가 들렸다. 아마도 크게 낙심했으리라.
나는 조심스럽게 반대편 복도를 지나 가게로 다시 돌아갔다. 혹시라도 직원과 마주치게 될까 조마조마한 심정이었다.
“야! 어디갔다 이제 오냐?”
“화장실에 좀…”
“하여간… 쯧. 일도 못하고 동작도 굼뜨고. 어디 하나 마음에 드는 구석이 있어야지. 꼴에 대학교 다녔다고 시키지도 않고 잘난체나 하고.”
사장 1은 툴툴대며 주저 앉듯이 의자에 몸을 파묻었다.
“형! 우리 이제 어떻게 해?”
여전히 신문을 들고 있던 사장 2에게 질문을 던졌지만, 그는 아무런 말이 없었다. 묵묵히 신문만 펼친채였다.
“아, 씨! 형! 우리 어떻게 하냐고? 이대로 그냥 가게 접고 나갈거야? 소송이라도 해야 되는거 아니야?”
신문을 거칠게 끌어내리며 채근을 했지만, 사장 2는 무표정한 얼굴로 다시 신문을 들어 올렸다. 사장 1은 큰 한 숨을 내쉬며 고개를 숙였다.
잘못봤는지 모르겠지만, 그의 눈가에 눈물이 맺힌게 아닌가 싶었다. 슬쩍 몸을 돌려 빈 복사지 더미로 향했다.
한 덩어리의 복사지 비닐을 찢어내고, 종이 뭉치를 양손에 잡았다. 그리고, 아침마다 늘 해오던 대로 트럼프 카드를 섞듯이 종이들을 이리 저리 휘었다 폈다를 반복했다.
복사기에 종이가 걸리지 않도록 종이 사이 사이에 공기를 넣어주는 이 작업은 가게의 막내이자 아르바이트생인 내가 주로 하는 일이었다.
가게 안에서 뭔가 할 일이 없으면 늘상 이 작업을 하면서 머리를 비우는게 이곳에서의 내 유일한 취미였다.
“야! 그만해라! 이제 좀만 있으면 가게 접는데, 복사지에 공기 넣어서 뭐하냐?”
사장 1이 야유하듯이 소리쳤다. 평소보다 억양이 다소 낮아진 것처럼 들렸다. 고개를 들어 그를 봤을 때 그는 두 손으로 눈가를 주무르고 있었다.
“어휴! 미련한 새끼. 형, 쟤도 이제 내보내죠.”
마치 내가 없다는 듯이 두 사람이 나의 처분에 관해 이야기를 했다. 사장 2는 많은 말보다는 동생인 사장 1의 말에 고개를 주억 거리는데 중점을 두었다.
직원은 이미 나보다 일주일 먼저 그만두었다. 나가기 전에 사장들에게 고래 고래 소리를 지르며 욕을 했지만, 아무런 소용이 없었다.
“잘가라. 너도 알지? 지금 우리 사정이 이런거. 그래서, 이번달 알바비는 전체 못주고 일한만큼만 주는 거야.”
얇은 봉투를 내미는 사장 1은 퉁명스러운 목소리 만큼이나 다소 불만섞인 표정이었다.
내가 손을 내밀어 봉투를 받으려 하자 그가 슬쩍 손을 뺐다.
“야, 너 내가 형이라서 말해주는건데. 너는 말이야. 그렇게 살면 세상 살기 힘들다. 남들한테 좀 살갑게도 대하고 그래야지. 애가 너무 뻣뻣해서 누가 널 좋아하겠냐? 일도 제대로 못하고… 너는 아마 뭘해도 안될거야. 하하하!”
왜 그런 말을 했는지, 왜 그렇게 웃었는지 지금도 알 수 없었다. 사장 2는 그저 언제나처럼 신문을 펼쳐 들 뿐이었고, 사장 1은 훈계조로 나에게 악담을 퍼붓고 있었다. 그는 그렇게해서 스트레스를 푸는게 아닐까?
영업장을 접어야 하는 울분을 그러식으로 해소하고 싶었던 게 아닐까?
지금으로서는 알 수 없다. 그때도 알 수 없었지만.
시간이 지나 집안의 가세가 회복되어 다시금 학교에 돌아갈 수 있었다. 학교를 쉬는 그 몇년 사이에 많은 것들이 변해 있었다.
학교에서 복사집들은 이제 찾아 보기 힘들었고. 수강 신청은 인터넷을 통해서 한다고 들었다.
세상에나! 복학하기 바로 전까지는 OMR 카드로 수강 신청을 했었는데!
또다시 나는 이방인이 된 것처럼 느꼈다.
“이 학교에서 나는 어디에도 속하지 않는다.”
는 심정이 밀려 들었다.
그러다가 문득 지금은 사라진 복사가게의 그들을 떠올려 본다. 그때도 나는 이방인이었고, 지금도 그건 변함이 없지 않은가?
“넌 뭘해도 안될거야?”
라던 사장의 말이 떠오르자 풋하는 작은 웃음이 튀어 나왔다.
당신들은 지금 잘하고 있을까?
이 이방인의 앞날에 대한 경고를 했던 당신들의 앞날은 과연 어떨런지…
p.s.나는 잘 살고 있다. 여전히 이방인이지만… ;-)
레드엔젤님의 댓글의 댓글
오늘은 제가 휴일이라서 잠시 쉬고 내일 4, 5번 도전해 보겠습니다.
늘 좋은 댓글 감사합니다.^^
벗님님의 댓글
실상을 들여다보면 타인의 모습을 하고 있는 자기 자신을 평할 때가 많은 듯 합니다.
부처 눈에는 부처가 보이고, 돼지 눈에는..
어떻게 마음 먹고 세상을 어떻게 살아가고 있는가.
아름다운 세상이 보이는 눈, 진실을 들여다보고 응원해주는 눈을 갖고 싶습니다.
세상 참 아름답잖아요.
좋은 글 잘 보고 갑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