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가지 이야기 - 10. 안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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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년 12월 27일.
눈앞이 캄캄하다. 앞이 전혀 보이지 않는다.
나는 어제 잠시 사귀던 여자와 헤어졌다. 아니, 차였다. 아니… 사실은 그냥… 이제 좀 지루해서 그만두자고 말했다.
내가 먼저 말했다. 물론, 나는 나쁜 놈은 아니다. 살다 보면… 연애를 하디 보면 헤어지는 것도 일상이지 않나?
그런데, 그에 대한 벌이 지금 상황이라면 이건 좀 너무하지 않나 싶다.
일, 십, 백, 천, 만, 십만.
빌어먹을!
일, 십, 백, 천, 만, 십만.
빌어먹을!
일, 십, 백, 천, 만, 십만.
빌어먹을 것!
아무리 숫자의 자릿수를 세어 봐도 여섯 자리를 넘어가지 못했다. 마치 보이지 않는 안개같은게 저 너머 있을지도 모를 숫자를 막고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침착하자.
어제 여자랑 헤어진 거랑, 매출 자료의 상관성이나 인과성은 눈꼽만치도 없다. 이게 그 벌이라고 생각하는 건 내 착각이자 망상일 뿐이다.
내가 언제부터 이렇게 선량한 양심에 귀를 기울였던가?
아니, 그렇다고 내가 여자나 함부로 갈아 치우는 놈팽이는 아니고.
포기하고 컴퓨터 화면의 숫자를 받아 들이기로 했다.
삼십팔만육천원.
2010년 전자책 매출 액수였다.
컴퓨터 화면의 상단을 유심히 살펴 보았다. 아무리 봐도 2010년을 가리키고 있었다. 하다 못해 2010년 12월 25일이나 26일, 단 하루를 가르키고 있었다면 안심이라도 될 것을.
어디서부터 잘못되었을까? 기억의 안개를 조금씩 걷어 가 보았다.
2010년 8월에 이 회사에 입사했다. 직장 상사는 뭔가 감정이 결핍된 것처럼 보였는데, 나중에 알고보니 그는 이 일을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고 한다.
처음에는 회사 적응 차원에서 이런 저런 관련 부서를 돌며, 곁눈으로 그들의 일을 배웠다. 뭐, 배웠다고 하지만 그냥 저냥 시간만 때웠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듯 하다.
실제로 업무에 투입된 건 11월 말이었다.
맙소사! 3개월이 그냥 날아간 셈이잖아!
전자책 업무를 위한 세팅은 불과 보름 정도였을 뿐이다.
출판사라는 미지의 세계를 둘러싼 안개는 거쳤지만, 눈 앞의 시선 차단막이 완전히 사라진건 아니었다.
회사의 업무 활동을 살펴 보면서 내가 깨달은 건 그 유명한 소설의 대사였다.
아무래도 좃됐다.
진짜 아무리 생각해 봐도 이 생각 뿐이었다.
계약서에는 전자책 관련 기재 사항이 전무했다.
오! 맙소사! 이 사람들은 계약서를 뭐라고 생각하는 거야?
책을 내기 위한 파일(조판을 위한 인디자인 파일과 인쇄를 위한 PDF 파일을 말한다. 이것도 여기 사람들이 알려준게 아니라, 내가 스스로 편집 디자이너들을 찾아 알아 봤다. 쿽 3.3인가 뭔가 하는 옛날 프로그램을 사용하는 디자이너도 있었는데… 당신들은 상상이 가나? 무려 95년도 프로그램이다! 그것도 이 프로그램만을 돌리기 위한 구형 맥이 있어야 한댄다…)의 존재를 물었지만, 그들이 내게 전해 준 건 두루마리 필름들이었다.
이 사람들은 디지털 카메라가 아니라 필름 카메라를 쓸 것 만 같았다.
선사 시대에 떨어진 현대인의 감성이 아마도 이런 것이리라. 직장 상사가 그런 흐리멍텅한 눈을 한 것도 그제서야 이해가 갔다.
이제야 좀 안심이 된다.
내 탓이라기 보다는 이 지독하고 좃같은 환경이 문제라는 걸 깨달았으니.
물론 나는 남탓이나 환경 탓만 하는 놈은 아니라고 자부한다. 하지만, 이 꼬라지를 봐라.
아니, 과거의 꼬라지라고 해야 할 것이다. 지난주에 가까스로 계약서들에 전자책 사항도 추가하고, 도서 파일도 거의 대부분 확보했다.(망할 쿽! 만든 새끼들 다 뒤져버려라! 이걸 프로그램이라고 만들었냐! 한글로 조판하는게 이거보다는 낫겠다! 이 개 좁밥새끼들아!)
그 과정에서 10여개의 전자책 파일을 만들었다. 10여개라고 한 이유는 1차 제작이 완료되었지만, 지금 편집자들이 오탈자를 찾고 있기 때문에, 애매한 완성도를 가진 것들이 포함되어서이다.
아… 편집자들은 굉장히 신중했다. 그리고, 느렸다… 그리고 오탈자는 계속해서 나왔다.
지금 내 책상 서랍에는 일주일마다 쓴 사표로 꽉 차 있다. 문구는 거의 비슷하지만, 나중에 그 중 어떤 걸 쓰게 될지 벌써부터 흥미진진해 진다. 씨발…
아무튼 내일은 상사에게 이야기해야겠다. 적어도 이건 내 잘못이 아니라고. 이 매출은 내가 입사하기 전까지 당신이 한 결과라고.
2025년 3월 6일에 추가(이 일기를 꺼내 읽고 나서 씀)
38만원 숫자 보고 절규하고 있을 과거의 나에게.
작년 매출은 그래도 좀 나았다.(참고로 20억 조금 넘어. 너 혼자 그걸 하는데도 말이지.)
매년 좋아질 거고, 어느 날 갑자기 매출이 좀 늘어 날 거다.
물론, 몇 년 동안은 싸가지 없는 영업자들이 너한테 ‘밥은 먹고 다니냐?’, ‘월급루팡이냐?’라는 등의 개소리를 할 거야. 그리고, 편집자들은 늘상 ‘데이터? 물루 ㅎㅎㅎ’라고 얼빵치면서 니 화를 돋을거야.
물론, 알고 있지? 너나 나나 한 성깔 한 다는거.^_^;
한동안 너는 ‘이 구역 미친 X’취급을 받겠지만, 그럭 저럭 회사에서 생활을 영위하고 있을 거야.
대출 좀 끼었지만 니 집도 마련했다는 소식을 들려주마.(좀 위안이 될까?)
여자친구들은(그래, 들이야, 복수형이지. 이 카사노바 시키. ㅋㅋ) 아쉽지만 오래들 못간다. 그래도, 사귀는 언니들의 미모는 점점 높아 지더라. 너 솔직히 그 동안 너무 얼굴을 안 봤어. 나는 니 삶을 돌아 볼때마다 그게 괴로웠다.
매출이 늘고, 책이 늘어 날때마다 너는 점점 욕을 줄여 갈 거다. 사회적인 지위와 체면이 대신 니 머리속에 들어갈테니까.
전표의 숫자가 점점 늘어나서 앞자리가 바뀌고 자릿수도 불어 날때마다 회사 사람들은 너를 전과 다르게 볼 거다.
아! 그리고, 너한테 깝죽됐던 사람들. 좌천되거나 나갔다. 아마 그 소식이 가장 듣고 싶었을 거다.
세상은 느리지만 그렇게 변해 가더라. 힘내라, 청년.
15년 후의 부장님이 되는 너님의 말씀을 새겨 듣도록.
벗님님의 댓글
틀렸다, 그게 아니야.
엑스표를 긋는다.
곧잘 맞추는 것 같았는데, 왜 이렇게 된 것인지.
엑스표, 또 엑스표..
문제의 난이도가 급상승한 것도 아닌데, 왜 모두 오답 투성이인가.
근본적으로 뭐가 문제일까, 어디 잘못 끼워맞춘 곳이라도 있는 건가.
그렇게 계속 엑스표를 긋고 있었다.
그는 그의 팔에 계속 엑스표를..
재미있는 글 잘 보고 갑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