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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두] 인간은 본래 선한가 악한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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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어디가니
작성일 2025.04.18 14: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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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2 조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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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세대 교체가 끝났습니다. 늙은 사자는 한가롭게 노닐던 자신의  영토에서 쫓겨나고 맙니다. 초원은 넓지만 여기처럼 깨끗한 수원이 있고 그래서 언제나 사냥감이 넘치는 곳은 드뭅니다. 아마 늙은 사자는 세력권을 떠돌다 결국 죽어갈 겁니다. 

승리한 젊은 사자의 포효가 우렁찹니다. 젊은 승리자 아래 암컷들이 엎드려 있습니다. 젊은 수컷은 곧 자신의 새끼를 갖게 될 것입니다. 역시 젊은 사자는 남은 할일을 잊지 않았습니다. 자신의 발 밑이 아닌, 저 건너편에 새끼를 품고 있는 암사자에게 다가갑니다. 낮게 으르렁거리는 암사자도 있지만 승리자는 아랑곳없습니다. 느긋하지만 목표가 분명한 발걸음, 그 끝에는 패배자의 새끼들이 있습니다.


(으적, 으적)


아무 일 없었다는 듯 젊은 사자는 자신의 왕좌로 돌아옵니다. 이제 승리의 기쁨을 만끽하는 일만 남았습니다. 

동물 다큐멘터리 방송의 나레이터 목소리가 조금 고조된다. 아마도 젊은 수컷의 감정을 표현해보려는 것이리라. 약육강식의 세계, 정의와 도덕과는 무관한 세계를 관찰하는 것은 은근한 기쁨을 준다. 저녁 뉴스의 사고 소식을 듣는 것과 같다. 내가 그 사고의 피해자가 아니라는, 그 무법한 세계의 일원이 아니라는 안도감이 등줄기를 타고 스멀스멀 기어오르기 때문이다. 전율에 가까운 기쁨이 방송 말미 사자 새끼의 두개골이 으깨지는 소리에서 절정을 이룬다. ‘카타르시스’라는 단어를 떠올리는 건 너무 사악한 것일까?  

절정의 순간이 끝나고 내 안의 현자가 눈을 뜬다. 동물의 행동에 선악을 따지는 게 무슨 소용일까. 하지만 자신의 유전자를 퍼뜨리기 위해 어린 사자를, 자신의 동족을 죽이다니. 인간은 유전자가 조종하는 생체 기게 따위가 아니다! 냉혈한 것들. 피가 차가운 뱀조차도 하지 않을 짓을 말이다. 손마디 관절처럼 점점 분명하고 단단해지는 불쾌감에 이어폰을 빼고 식탁으로 옮겨 앉는다. 식탁 옆에는 조그마한 닭 어리가 있었다. 조금이라 관리를 소흘히 하면 닭똥 냄새가 났지만 그래도 삭탁 바로 옆에 닭 어리를 두는 데는 그럴 만한 이유가 있다. 암탉 두 마리가 번갈아 하루에 한 개씩은 알을 낳는다. 그래서 매일 막 낳은 따끈한 달걀을 먹곤 했다. 방송을 보는 중 암닭 한 마리가 울음을 울었다. 달걀을 낳았다는 신호인 것이다. 식탁 의자에 앉자 어리 안으로 속을 쑥 집어넣어 본다.  역시 보드랍고 따끈한 알 하나가 손가락 끝에 걸린다. 채 굳지 않을 껍질에 송곳니로 살짝 구멍을 낸다. 그 구멍을 검지로 막고 반대쪽에도 똑같은 방식으로 구멍을 조금 더 크게 낸다. 그리고 그 구멍에 입술을 살포시 대고 쭉 흡입하면, 비릿밋이 전혀 없이 고소함만이 가득한 내용물이 내 위장으로 흘러들어온다. 혀보다는 코끝에 진하게 남는 고소함이다. 꼬꼬댁. 암탉의 울음. 오늘은 운이 좋다. 두 마리가 모두 알을 낳은 것이다. 꼬꼬댁. 그런데 수탉도 아닌 것들이, 이렇게 알을 낳으면 자랑스레 소리를 내는 걸까? 박제된 조류의 눈알처럼 동그랗게 멍청해 보이는 눈이 물기에 젖어 있다. 그 눈을 주시하며 슬쩍 달걀을 빼낸다. 감정이란 없을 것 같은그 눈알에 넓게 볼록해진 내 얼굴이 어름어름 비치는 것 같다. 두 번째 달걀은 내일 먹을까 싶었지만 묵힌 달걀을 먹기 싫다. 귀찮지만 맛있게 두 번째 달걀도 위장 속에 잘 저장해 두었다. 

든든해진 김에 미뤄둔 일을 마저 끝내야겠다. 이미 거의 완성된 코드지만 그래도 혹여 남은 버그가 있는지 확인해야 했다. 파인 튜닝된 학습 모델의 메트릭스를 이용해 최적의 짝을 결정하는 프로그램이다. 이 프로그램이 완성되면 파양률을 크게 낮출 수 있을 것이다. 단순히 해외 입양을 알선하는 것이 아니라 최고의 부모와 최고의 아이를 맺어주는 윈-윈의 솔루션을 제시할 수 있게 된다. 이것만 완성이 되면 타 입양업체를 가볍게 따돌릴 테고, 국내를 넘어 해외까지 사업이 확장되겠지. 그러다 수요을 감당하지 못해 직접 아이들을 찾아내야(?) 할지도. 벌써부터 흐뭇해지고 입가로 맑은 침이 삐쭉 흘러 내린다. 아니 달걀 흰자위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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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3

현이이이님의 댓글

작성자 현이이이
작성일 04.20 20:25
태초에 공허에서 빛이 생긴것처럼,
인간이 만든 선과 악이기에 대부분의 본능적 욕구는 근시안적이고, 폭력적이고, 욕망적이기에 그걸 억누르고 장기적이고 가치있거나 이타적이고 빛나는것을 선이라고 규정하게 되는거 같습니다.

질문이 "인간은 본래 선한가 악한가" 라면 아마도 악하게? 라기도 뭐라면 선악의 구별이 미약하게 태어나서 선과 함께 각성해가는 과정이 아닐까 생각이 듭니다. 융은 이걸 개성화라고 합니다. 성배를 추구하는 모험입니다.

또는 다른 표현으로는 우리 내면에 성령의 인도하에 신성을 획득하는것이 태어난 이유인지도 모르겠습니다.

라고 '저는' 믿고 살아갑니다. ㅎㅎ

어디가니님의 댓글의 댓글

대댓글 작성자 어디가니
작성일 04.21 10:33
@현이이이님에게 답글 다소 물리적 기계적인 입장인지라 화두에 어떤 답을 달기보다는 되도록이면 아이러니한 인간의 삶의 장면을 그려보고 싶었습니다. 어떤 장면을 어떻게 그릴 것인가에 대한 고민의 시간과 고민의 깊이가 짧고 얕아서 잡소리가 되어 버렸지만요. 믿음은 곧 의지가 되고 힘이 되니 사람의 자식으로 무엇인가 붙잡고 살아야겠습니다. 말씀 감사합니다.

벗님님의 댓글

작성자 no_profile 벗님
작성일 04.21 11:12
"식욕이 선인가 악인가 하고 물으면 답을 하기가 곤란해진다.
 배고픔은 선인가 악인가, 숨을 쉬는 것은, 잠을 청하는 것은.
 어찌 보면 생명을 유지하기 위한 일련의 과정을 두고,
 그것이 바람직한가, 바람직하지 않은 것인가 하고 묻는 듯한 아리송함이 느껴진다.
 동물 세계에서의 천적이 먹이를 사냥하고 먹는 것에 대해
 선과 악을 거론하지 않는 것처럼, 강자가 약자를 탐하는 것은 당연한 거다.
 여기에 대해 부당하고 말하는 이들은 자신이 약자이기에 그렇게 목소리를 높이는 거지,
 강자의 입자에서 그러할까, 굳이 자신의 이익을 포기하면서? 그럴 리가 없지.
 내가 해주는 일은 말이야, 최고의 가정을 만들어 주는 거야. 은혜를 내리는 거지.
 어디 한 번 이 손가락으로 마법을 부려볼까?"

재미있는 글 잘 보고 갑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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