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eeyaArborm (115.♡.148.24)
2026년 5월 31일 PM 02:13
* 이 이야기는 100% 창작을 통해 만들어진 허구입니다.
지명, 인물명, 단체명이나 사건명들이 실존하거나 실제와 비슷한 경우가 있더라도 그것은 완전히 우연에 의한 것임을 밝힙니다.
* 격주(26.06.07)로 연재될 예정입니다.
첫 편지 :
https://damoang.net/writing/4592
두 번째 :
https://damoang.net/writing/4613
세 번째 :
https://damoang.net/writing/4616
네 번째 :
https://damoang.net/writing/4648
다섯 번째 :
https://damoang.net/writing/4675
여섯 번째 :
https://damoang.net/writing/4695
일곱 번째 :
https://damoang.net/writing/4769
여덟 번째 :
https://damoang.net/writing/4798
아홉 번째 :
https://damoang.net/writing/4822
등장인물
Q선생님 : 40대 후반의 여성. 화자인 ‘경숙’에게 글쓰기를 가르쳐준 선생님. 지금은 남편과 미국에서 살고 있다.
경숙 : 50대 초반의 여성. 편지를 쓰는 주인공. 그린아크 초원 아파트로 이사해 겪은 기묘한 일들을 Q선생님에게 쓰고 있다.
(똑순이) 소라 : 40대 후반의 여성. 경숙의 하우스메이트. 개를 좋아하며 경숙 때문에 간접적으로 놀라운 경험을 하고 있다.
초코·세라 : 경숙의 강아지. 경숙과 소라의 엄청난 사랑을 받고 있다. 둘의 자식 같은 존재.
이무백 : 40대 후반의 남성. 경숙의 전 연인. 사채로 돈을 많이 번 부모 밑에서 자랐다. 다정하고 유약한 남자.
경숙엄마 : 70대 중반의 여성. 경숙과 전형적이면서도 특별한 관계를 맺고 있는 엄마. 서로 많이 다른 듯, 닮았다.
강현주 사무국장 : 40대 중반의 여성. 우리가족 협동조합의 사무국장. 경숙이 그린아크 공동체운영위원회와 갈등을 겪을 때 많은 도움을 준다.
(방귀남) 여종민 : 50대 초반의 남성. 초동 인근 커피숍에서 일하고 있으며, 사람이 없을 때 방귀를 뿡뿡 뀌어대는 모양이다.
손호영 : 30대 중후반 남성. 그린아크초원 공동체운영위원회의 2대 회장. 2022년 10월 달에 회장이 되었다. 누가 봐도 추남이다. 다행히 옷은 잘 입는다.
우지현 : 40대 중반의 남성. 그린아크초원 공동체운영위원회의 초장기 위원이자 첫 상임위원으로 사무국장 역할을 맡았다.
윤아림 : 40대 초반의 여성. 그린아크초원 공동체운영위원회의 초창기 위원이며 공동체활성화단의 단장. 친환경 이상주의자이며 회의나 토론이 잘되지 않는다.
<10화 500개의 욕망>
Q선생님, 지난주에 근처 애견동반펜션을 며칠 다녀왔어요. 날이 더 추워지기 전에 강아지들과 추억을 만들려고요. 별 건 없었어요. 단풍으로 물든 산길, 사람 없는 펜션촌 주변을 세라초코랑 걷고, 뒹굴거리면서 좋아하는 유튜브 영상들 보고, 저녁엔 와인과 맛있는 고기를 먹고... 시시하지만 꿈 같은 시간이었어요. 그래서일까요? 일상으로 복귀하는 게 너무 힘드네요.
똑순이 소라도 같이 갔고요, ‘의외의 손님’도 있었어요.
와인을 소라가 준비하고 저는 호주산 와규 윗등심이랑 보리 먹인 캐나다 돼지 목살을 사 오기로 철석같이 약속했는데, 글쎄 그걸 홀랑 까먹었지 뭡니까….
저는 요즘 이벤트회사를 다니고 있어요. 홍보, 마케팅 목적의 행사를 기획, 진행하는 건데 예전에 다 해본 거지만 오랜만에 다시 하니 쉽지가 않네요. 일에 치여서 정신줄을 놓고 있었나 봐요. 똑순이 소라가 놀러 갈 준비를 혼자 다 도맡아 했고, 저는 꼴랑 고기만 사 오기로 한 걸 완전히 까먹었으니....
제가 소라한테 얼마나 갈굼을 당했을지는 상상이 가시죠?
펜션에다 바비큐 불을 피워달라고 막 말을 했는데, 고기가 없다는 걸 알았죠. 숯불 앞에서 상추랑 김치 먹게 될 판이었어요. Q선생님은 모르실 겁니다. 법조인 소라가 사람을 얼마나 조리 있게 조근조근, 무섭게 다그치는지를요.
듣고 있으면 “그냥 내 뺨을 한 대 치고 끝내면 안 되겠니?”라고 사정하고 싶을 정도예요. 소라한테 혼나고 있자니 미래에 소라남편 될 사람은 실수를 하나도 하지 않거나, 저런 말도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릴 대범한 인물이길 빌게 되더라고요.
어쨌든 백 프로 제 잘못이니 뭐라 변명하거나 대거리할 것이 없어 죽을 맛이었죠. 그때 기적처럼, 마치 구원의 신호처럼 제 휴대폰이 울렸어요. 액정에 ‘방귀남’이라고 떴습니다. 소라가 슬쩍 봤죠. 한 마디 하대요.
“언니, 저 남자랑 연애해?”
제가 그 말 듣고 어찌나 깜짝 놀랐는지! 벌떡 일어나서 펜션 거실을 두 바퀴쯤 빠르게 돌았던 거 있죠? 소라가 인상을 팍- 쓰더니 실성한 척하지 말고, ‘썸남’ 전화나 받으라고 하더군요. 그래서 일단 받았습니다. 소라의 잔소리를 더 들었다간 정말로 실성할 것 같았거든요....
종민씨는 창고형 대형마트에서 장을 보며, 휴대폰으로 Q선생님께 보낼 편지를 읽다가 궁금한 게 생겨 전화한 거였어요. 그때 제 귀에 꽂힌 단어가 ‘창고형 마트’였어요. 거기엔 호주산 와규 윗등심과 보리 먹인 캐나다 돼지 목살을 팔거든요. 제가 살려달라고, 그것 좀 사서 빨리 와달라고 했어요. 옆에서 팔짱을 끼고 듣고 있던 소라가 대놓고 빈정거렸어요.
“대놓고 남자를 부르네.”
‘야, 이년아! 네가 이렇게 갈구는데, 고기 사 온다면 남자가 아니라 남자 할아버지라도 불러야지!’라고 일갈하고 싶었지만, 놀러 와서 하·메랑 쌈박질할 수는 없어서 그냥 참았습니다.
그런 연유로 종민씨가 ‘의외의 손님’자격으로 펜션에 와서 같이 고기를 구워 먹었답니다. 세라초코, 소라와 다 함께요.
종민씨가 숯불에서 불이 솟구치지 않게 고기 굽는 법을 알려주면서 직접 다 구웠어요. 그 광경을 옆에서 지켜보던 소라야말로 종민씨한테 반한 거 같았어요. 걔는 원래부터 맛있는 거 주는 사람한테 약해요. 제가 요리를 곧잘 하니까 하우스메이트가 된 것처럼요.
종민씨가 전화로 저한테 물었던 건, 윤아림에 관한 거였어요. 그녀가 그 코딱지만한 아파트 단지에서 겪었던 등락이란 게 뭔지 궁금하다고 대충 알려달라고요.
순전히 제 추측인데 윤아림은 그린아크라는 작은 사회 내에서 가장 큰 등락을 겪은 인물이 아닐까 싶어요. 그의 그린아크 시작은 근사했어요. 하지만 그의 현재 입지는 입주 초만큼 좋다고 하긴 어려운 상황입니다.
윤아림은 입주 전부터 활발한 활동을 했습니다. 시행사 소셜밸류에서 입주 전 그린아크초원 커뮤니티디자인팀을 운영할 때부터 거기 있었던 걸로 알고 있어요.
제가 그를 기억하게 된 계기는 입주 초, 카페에 올린 글이었어요. 그 글에는 그가 이 아파트에 기대하는 낭만과 희망이 넘쳐흘렀어요.
윤아림은 환경보호에 남다른 관심이 있었고, 인위적인 것, 인공적인 것보다는 좀 부족하고 어설퍼도 있는 그대로를, 근사한 결과보다는 끝이 소박하더라도 과정이 즐거운 활동에 의미를 두는 사람처럼 보였어요. 그런 비전에 대한 확신도 나름대로 있었고요. 가만히 앉아서 희망 사항을 말하는 게 아니라, 행동하면서 이뤄지길 바라는 사람의 말투여서 저한테는 좋게 느껴졌어요. 그래서 기억에 남았고요. 물론 그의 생각에 제가 다 동의했다는 의미는 아닙니다. 꿈꾸는 사람을 응원하는, 그런 종류의 호감이었어요.
재밌었던 건 당시 소라의 반응이에요. 윤아림은 글을 잘 쓰는 편이고, 또 그 글의 톤은 부드러웠지만 제법 강한 자기주장을 담은 장문이었거든요. 눈에 띄는 글이라서 소라도 꼼꼼히 다 봤더라고요. 그리곤 너무 싫어하는 거예요!
“아니, 이 여자는 뭔데 이 아파트를 이렇게 만들 거래? 난 친환경이랍시고 화단에 막 잡초 가득하고, 어설픈 마을 활동으로 돈 쓰는 거 싫은데? 내가 관리비, 커뮤니티비, 사업준비비까지 내는 돈이 얼만데, 그 돈이 아마추어들 취미 활동으로 낭비되면 너무 열받잖아. 안 그래, 언니?”
소라 말을 들으니까, 그것도 이해가 가더라고요. 새삼 깨달았어요.
‘아... 이 500세대가 사는 이 아파트는 500개의 욕망이 있겠구나...’ 라고요.
누군가는 칼같이 관리 된 정원에 경비아저씨가 아침마다 정문 앞에서 출근 차에 경례하는 광경을 원하고, 어떤 이는 벌과 나비가 날고 농약 없이 가꾼 정원에 아이들이 종일 재잘대며 뛰노는 아파트를 꿈꾸고, 나 같은 사람은 강아지들이 마음껏 활보하고 사람들과 즐겁게 어울리는 그런 단지를 기대하고....
그때 저는 소라의 말에 이렇게 답했어요.
“자기가 꿈꾸는 아파트는 이렇다, 저렇다, 말할 수 있지. 그대로 되느냐 아니냐는 다른 문제고. 로또 안 될 거지만, 됐다치고 어떻게 살지는 얘기해 볼 수 있잖아? 몇 백년쯤 꾸준히 사다보면 당첨될 수도 있는 거고.”
온라인에서 가졌던 윤아림에 대한 호감은 그녀를 처음 만난 순간 많이 달라졌습니다. 그린아크초원의 운영체제가 시행사 소셜웨이브의 임시사무국에서 우지현 사무국장 체제로 넘어가면서 공동체운영위원회 위원들이 전면에 나서서 여러 활동을 시작했어요. 윤아림은 운영위원이었고, ‘공동체활성화단’의 단장이기도 했어요. 그때 운영위원들이 ‘무슨무슨 단’을 만들어서 열심히 활동하기로 했나 보더라고요. ‘함께배움단’, ‘약속과규칙단’을 비롯해서, 이런저런 단들이 좀 있었어요. 공동체활성화단은 이름 그대로 아파트 공동체의 활성화를 위한 행사를 기획하고 지원하는 역할인 듯했습니다.
소셜웨이브의 임시사무국 시절에는 거의 매달 커뮤니티센터 주변에서 야외 행사가 열렸어요. 당시만 해도 이 동네는 뭐가 없어서 우리 아파트행사는 초원동에서 제일 신나는 볼거리, 즐길 거리였죠. 그런데 우지현이 상임위원으로 사무국장을 맡으면서 행사가 멈췄어요. 아쉬웠지만 손이 바뀌니까 이래저래 바쁜가보다 했죠. 그러다 몇 달이 지나 드디어 마을 행사를 할 거라고 하대요. 공동체활성화단을 중심으로요. 그 소식이 들리고 얼마쯤 지나 동아리 회장들 대상으로 회의를 하자는 공지가 떴습니다. 멍냥수다방의 방장인 저도 연락을 받았어요. 고르고 고른 날짜는 평일 저녁 8시. 다들 직장에 다니고 사회생활을 하니 그나마 만만한 게 그 시간대죠.
그날 저도 바쁜 일과를 마치고 회의를 하러 커뮤니티센터 내에 있는 카페에 갔어요. 꽤 많은 사람들이 모여있었습니다. 동아리 회장들이 스무 명도 넘게 왔고, 윤아림을 비롯해 공동체활성화단의 멤버들도 보였어요. 사람이 많아서 제법 대규모 회의였습니다. 공동체활성화단에서 마이크와 화이트보드도 준비했고 출력물도 가져왔더라고요.
회의 의장이라고 해야 하나, 진행이라고 해야 할까요? 그 역할을 윤아림이 맡았는데요.... 그 날 회의는 제 인생 최악의 회의였습니다. 윤아림이 회의 진행을 정말 못했어요. 깜짝 놀랐습니다.
저는 부글부글 끓기 시작했어요. 원래라면 집에 가서 사랑하는 강아지들을 껴안고 쉬고 있을 때인데, 제대로 준비도 안 됐고, 뭘 정하자는 건지 알 수 없는 중언부언이 반복되는 회의 같지도 않은 회의에 앉아 있자니 너무 열이 받더라고요. 그때 세상에서 가장 회의 진행을 못 하는 사람을 정하는 투표 같은 게 있다면, 저는 망설이지 않고 윤아림에게 표를 던졌을 겁니다.
결정적으로 화가 난 건 진행도 더딘데, 가만 보니까 자기가 정한 방향으로 가지 않으면 회의 진도를 나가지 않는 행태였어요. 아니, 갔다가 다시 돌아와서 그 얘길 또 하더라구요?
와, 그때를 떠올리면 지금도 살짝 열이 오르네요.
그날 이후 저는 기존에 품었던 윤아림에 대한 호감이 싹 사라졌고, 그저 무참하게 회의를 못 하는 사람, 다시는 공적으로 마주치고 싶지 않은 사람으로 뇌리에 박혔죠. 물론 공적으로 그렇다는 거지 사적으로는 좋은 사람일 거라고 생각했어요. 그녀가 글로 풀어낸 소박한 아파트 풍경은 여전히 공감할 수 있었으니까요.
그런데... 멍냥수다방과 우지현의 ‘정치적 딜’로 결정된 마을 행사 때문에 저는 다시 그와 만나 ‘공적인 회의 내지는 토론’을 할 수밖에 없는 처지가 되었답니다.
지금 Q선생님께 편지를 쓰면서 돌이켜보니 그런 생각이 드네요. 이건 남들 눈에는 이혼할 게 빤히 보이는데, 당사자들은 어떻게든 될 거라며 식장을 잡는 예비부부 같다고요. 저도 윤아림도 결말을 모른 채, ‘공동체’라는 단어의 힘만 믿었던 게 아닐까 싶어요. 그 공동체에 투영된 각자의 욕망은 너무나 다른 거였는데 말이죠.
2025년 10월
선선한 가을에 편지를 쓰다 열이 오르는 경숙 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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